그럴싸한 시간

한동안 평일 점심으로 아몬드를 먹은 적이 있다. 여러 견과류가 담긴 통을 사다가 조금씩 덜어 먹은 게 시작이었는데,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아몬드를 먹을 때의 느낌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입안에 담기는 고소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아몬드에서 자연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생각도 했는데 풀이 뭉뚝하고 단단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인가 싶기도 했다. 한때 견과를 밥처럼 먹었지, 라고 생각하다가 오래전 산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 단단한 풀 때문인가 싶다.

3년 전 어느 겨울엔가, 산을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은 바라볼 때만 좋아서 여행도 바닷가로만 다녔는데 그때는 조금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로 아울렛을 찾았고, 두 번의 주말을 보내는 동안 배낭과 재킷, 티셔츠, 바지, 등산화 같은 것들을 사들였다. 인터넷으로도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했는데 그중에는 아이젠도 있었다. 언젠가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배낭과 물품을 정리하다가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다음 주말이 왔을 때 나는 드디어 산에 오르게 되었다. 늦은 겨울, 서울 남쪽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청계산이었다.

가끔 옷장 서랍에서 투명 비닐에 싸인 손수건을 본다. 포장 그대로 남아있는 그 수건은 오래전 산에 갈 준비를 한다며 샀던 많은 물건 중 하나다. 마음에 드는 무늬를 찾겠다고 꽤 오랜 시간 돌아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겨울이지만 곧 여름이 오면 땀이 많이 날 테니까, 그래서 준비해둔 것인데 그해 여름, 나는 산을 오르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청계산은 지금까지 내 의지로 오른 처음이자 마지막 산이 되었다. 가끔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보면 ‘저도 청계산 가본 적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경험을 묻고 탐하고, 조용히 공감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봄이 한창일 때 한라산을 오르면 걷는 내내 유채꽃도 보고 좋을 텐데, 아이젠 없이도 신기하고 재미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한라산에 유채꽃이 얼마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제주에 널리 퍼진 유채꽃만큼 내 주변 많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좋은 경험을 나누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도 모레도 맑은 웃음이 함께 하기를, 가끔은 그 한구석에 나에 대한 기억도 자리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