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선다. 안내 방송도 없이 조용하다. 우리는 젊은 남자 하나, 젊은 여자 둘, 아이 하나, 노인 하나, 이렇게 다섯 명이다. 집에 가려고, 집에서 나가려고, 회사에 가려고, 그냥 바람이나 쐬려고 움직이던 차에 다 같이 멈추어 버렸다. 우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내린 게 12층이었으니 이제 한 8층 정도 되었나 싶다.
비상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불이 들어오는 걸 보니 전기 문제는 아닌 듯싶은데 작동하는 버튼이 없다. 5분쯤 지났는가 보다. 시간이 멈추었는지도 모르겠다. 휴대폰은 엘리베이터를 탈 때부터 통신이 끊겨 있다. 노인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아이는 그런 노인을 쳐다본다. 가방에 책을 넣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손에 잡히는 게 없다. 거울을 꺼내 들고 귀걸이를 본다. 귀에서 볼을 지나 코에 내려앉은 땀을 본다. 엘리베이터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 문을 두드린다. 남자의 티셔츠 뒷면에 새겨진 얼굴이 우리를 보고 웃는다.
아이가 여자 하나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노인을 번갈아 쳐다본다. 젊은 남자는 소리치기 시작한다. 여기예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이가 나를 뚫어지라 보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잠시 덜컹하더니 조용해진다. 재영아파트 정기 반상회. 한쪽 벽을 빼곡히 덮은 광고지 위로 새 종이가 붙어 있다. 반들반들한 면 위로 형광등이 반사된다. 종이가 빛을 반사할 리 없는데, 생각하면서 하서원 중화반점, 해주분식, 생과일의 아침, 예진 보습학원, 무지개 어린이집, 알아볼 수 있는 글자만 우선 읽어 본다.
엘리베이터 문이 조금 열린다. 웅성대는 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경비원의 목소리도 들린다. 윤주야, 안에 있니? 윤주야, 아이가 문 사이로 밖을 내다 본다. 윤주야? 젊은 여자 하나가 거울을 꺼내어 들고 화장을 고친다. 계속 17층인줄 알았어요. 언제 내려왔대요? 노인이 바지를 털면서 일어난다. 남자는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해주분식은 곧 휴가라고 했는데, 광고지가 남아 있으면 누군가 전화를 하지 않을까, 배달시키자 생각을 하지 않을까, 혹은 이따 거기서 봐, 하면서 약속을 잡고 김밥도 먹고,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괜한 헛걸음을 할지 모르겠는데, 싶은 생각을 하다가 거울을 보는데 귀걸이가 사라지고 없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걸어 나간다. 구급차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왜 버튼은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를 걸어 나가는데 갑자기 누가 팔을 잡는다. 그 바람에 가방에서 책이 떨어졌다. 아까는 분명 없었는데 어디에서 나왔나 모르겠다. 아이는 젊은 여자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여자의 눈치를 계속 살피면서 걸어간다. 노인은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남자가 앞에 서서 손을 흔든다. 여기예요, 여기 사람이 나오고 있어요. 재영아파트 정기 반상회. 반들대는 종이가 아파트 입구에도 붙어 있다. 화단을 덮은 잔디가 고운 걸 보니 봄은 봄이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멀어진다. 젊은 남자 하나, 젊은 여자 둘, 아이 하나, 노인 하나, 이렇게 다섯이 살아남았다. 아직 우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