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종이에 이름을 백 번 적으면 꿈에 그 사람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름과 소설 제목을 공책에 수없이 적었고, 다음 날 아침 울면서 잠을 깼다.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백 번 소리 내어 부르면 마음이 편해진다길래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음악을 듣다가도, 공부하거나 책을 보다가도,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아마 불렀다기보다 입에서 그냥 나왔을 테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는 했다. 그리고 다시 외국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와 더글라스 케네디가 내 정체된 욕망을 살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크라이튼이 세상을 떠나고 이삼 년쯤 지난 뒤였다. 언젠가 마음에서 집착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그의 마지막 소설을 꺼내어 읽었다. 미출간으로 남아있던 걸 누군가 발견한 덕분이라 했다.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나서 악수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사라져서 아쉽고, 슬프고 그랬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많이 울었는데, 그래서 한동안 외국 작가의 책도 안 봤는데, 그런 시기를 지나 이렇게 또 잘 살고 있으니 어쨌든 삶은 계속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쥬라기 공원과 잃어버린 세계였다. ‘인젠’ 때문에 유전공학자를 꿈꿨다가 네드리와 아비를 보면서 프로그래머와 해커를 동경했고, 레빈과 그랜트, 하딩 때문에 동물학자와 고고학자가 되는 상상을 했다가 말콤을 보면서 수학자를 동경했다. 닥터 손 때문에 언젠가 포드 익스플로러를 타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의 대사 몇 마디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도 했다. 소설 중간 트레일러에서 하딩이 켈리에게 하는 조언과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손의 독백은 아직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지표로 남아 있다. 그 덕분에 콩고를 알게 됐고, ERTS와 델로스를 알면서 데이터베이스와 인공지능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내가 컴퓨터 앞에서 떠올리는 모든 그림은 그의 소설에 이미 등장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를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 모든 욕망의 출발점이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중 하나는 이루었다. 이름 뿐이긴 하지만 결국 전공 중 하나로 고고학을 남겼으니까. 그래서 말이지만 크라이튼, 고마웠습니다. 리처드 레빈, 하딩, 손, 아비, 그랜트, 말콤, 네드리, 헨리와 다프네, 모두 고맙고요. 이슬라 소르나, 이슬라 누블라, 어딘가 잘 있겠지요. 사이트 B,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알파벳도 B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내 삶은 당신에 대한 오마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