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란 선물

내 전화기는 거의 울리는 일이 없다. 전화가 걸려와도 신호음이 나지 않거나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칠 때가 많다. 어쩌다 실수로 받으면 대부업체의 광고거나 교우회에서 돈을 내라거나 하는 전화일 뿐이다. 집에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어서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엄마나 아빠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일도 없거니와 친구가 깜짝 방문할 일도 없어서 한 반년쯤 집에만 머문다 해도 벨이 울리거나 누가 밖에서 ‘계세요? 없어요?’ 하고 부를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삶이 가능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책도 보고 공상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제와 다르지 않지만 편안한 익숙함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회사에 다닐 때는 퇴근하면서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큰 길가를 오가는 게 좋았다. 가끔 운이 좋으면 굉음을 내면서 달리는 멋진 차를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상상을 했다. 집 근처 골목에 들어서면 냉장고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버드와이저와 소시지 생각에 코가 벌름거렸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면 가방만 벗어 던지고 냉장고 앞에 앉아 맥주 캔부터 따곤 했다. 그 시절 나의 하루가 행복해지는 데는 그리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 집은 오래전부터 이런 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소시지를 굽다가 말고 와인이 생각날 때도 있었는데, 집에 남은 와인이 없다는 걸 알면 마트로 달려가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것으로 두 병을 사다가는 한 병은 그대로 마시고, 남은 한 병은 주말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다. 대체로 정신이 들면 새벽 두 시쯤이었고, 그제야 나는 냉장고 앞을 벗어나 침대로 갔다. 그리고 이렇게 잠자리에 드는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주말이 되면 남은 맥주와 와인으로 이틀 동안 파티를 벌였는데, 조금씩이긴 해도 쉬지 않고 마셨기 때문에 취한 것도 아니고 멀쩡한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침대와 완전히 멀어지거나 침대에 꼭 붙어만 있는 채로 주말을 지내고 나면 월요일이 왔고, 해가 중천에 닿은 뒤에야 나는 그날이 월요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 덕분에 월요병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지만, 동시에 주말 계획을 세워본 일도 없었다. 가끔 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늘은 어디쯤인가 한참을 생각하다가도 냉장고 앞에 앉아 맥주를 해방하는 순간 고민은 그저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익숙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한없이 평범했지만, 반복된 하루 속에서 내가 누린 것은 정형화된 행복이었다. 그것은 버튼만 누르면 가질 수 있는 선물이었으며 오직 이 집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