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쓴 여자가 계단을 오른다. 진동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 아파트에는 부서진 잔해만 남아 공간을 채운다. 여자는 옥상에 올라 건너편 건물을 본다. 아직 파란 칠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물을 맞고 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호스를 들고 이리저리 물을 뿌리면서 한 번씩 고함을 친다.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다. 이리 와요, 여기 물이 있어요. 여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당신들은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를 부를 수 있죠. 여자는 아파트 일 층 입구에서 홀로 빛나는 동상을 내려다본다. 주민 자치를 기념한다고 세운 동상은 운이 좋게도 폭발을 피해 갔다. 여자는 세계가 저 혼자 싸움을 벌이다가 기어이 무너지고 만 것으로 생각한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파트 옥상을 보고 웃는다. 이리 와요, 여기는 이제 비가 오지 않아요. 우리한테 물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