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다비드

창 한쪽 구석에서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반대편 구석으로 사라진다. 방이 해를 삼키는 시간이다. 내가 누운 자리에서는 앞집 옥상이 보인다. 오늘은 모자를 쓴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남자는 머리가 덥수룩해서 얼핏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 평소 같으면 방정맞게 움직였을 빨래가 오늘은 곱게 매달려 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날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옥상에 올라온다. 하지만 건너편 집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방 한쪽 구석에서 조각상의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다비드.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었지만, 생김새가 영 달라서 무명으로 남겨 두었다. 이름 없는 조각상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옷을 반쯤 걸치고 있다. 나는 포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글자를 그리다가 선을 하나 잘못 그어서 이를 어쩌나 싶던 중 그냥 누워버렸다. 어느 책에선가 본 문구를 쓰고 싶었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포스터는 무명 다비드 뒤에 붙일 예정이었다. 그래서 다비드를 볼 때마다 이 글을 발견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조각에 이름이 없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때때로 생각하는 것도 소음이 된다. 그러면 나는 불안해져서 돌아누웠다가 앉았다가 한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 입니다. 나는 내일을 바라지 않는데 누군가는 내일을 그토록 원하는구나. 내가 오늘을 아무렇게나 보내면 그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게 될까. 만일 나에게 내일이 없다면 그 하루는 누가 갖게 될까. 포스터 작업을 마저 해야겠다. 잘못 그린 선은 원래 의도였던 것처럼 강조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