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를 신는 삶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의 성격에 관해 생각해봤다. 우선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을 좋아할 것 같다. 가끔 맨발로 바닥을 디딜 때면 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기분을 느꼈을지 모른다. 슬리퍼를 신다가 보면 수시로 벗어둘 공간도 필요한 법인데 슬리퍼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이미 그런 공간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현관 앞, 화장실 앞, 침대 옆, 또는 티브이 앞에 앉아서 어딘가 발을 올려둘 때도 항상 슬리퍼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은 청소를 자주 하기보다 한 번 닦고 정리한 다음에 오래 유지하는 걸 선호할 것이다. 잘 어지르지 않는 차분함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 사람이 게으름을 즐기면서도 그 게으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생활 공간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한 번 정리해두고 건드리지 않는 건 게으른 자만의 능력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슬리퍼를 신기 시작한 이유가 단지 몸에 먼지가 묻는 게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닥에 먼지가 있을지 모르니 발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신었을 거란 이야기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지낸다는 것은 관리해야 할 생활용품이 하나 늘어난다는 뜻이다. 매일같이 신어야 하니 금세 더러워질 것이고, 그러면 주기적으로 닦거나 빨아줘야 하는데 언젠가는 신발처럼 해지고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한 번씩은 새로 살 필요도 생긴다. 그런데도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다면 그건 분명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탓일 것이다. 혹은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균형 잡는 것에 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즐기는 게으름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