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쉬운 일

이름을 잊었다. 나이도 잊고 사는 곳도 잊었다. 만난 적이 없으니 얼굴을 잊을 일은 없다. 미안하다.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밤늦게 잠드는 일이 사라지니 내일이 기대되지도 않는다. 눈이 온다고 창을 열 일도, 비가 들이친다고 문을 닫을 일도 없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은 짧고 시간은 혹독하다.

유쾌한 하루다. 웃는 사람은 슬픈 생각이 많다. 쉽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미워하기도 쉽다. 아침이 온다고 저녁이 사라진 게 아니다.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흔적

내가 그들에게서 듣는 건 나는 가져본 적 없는 다른 누군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 표류의 흔적들이다. 그건 연민도 동질감도 아니며 그저 나 자신일 뿐. 글이 나를 읽고 해석이 나를 해체한다.

기도

매일 아침 불편하고 낯선 하루가 나를 반기길 바란다. 매일 밤 사납고 추운 바람이 나를 두렵게 하길 바란다. 매 순간 내 판단이 틀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미궁에 빠지길 바란다. 내가 그들을 의심하는 만큼 내 주위 모든 이들이 나를 의심하길 바란다.

결말

“혹시 추리물인가요? 아님 로맨스?”
“추리? 모든 소설은 추리물이지. 작가는 탐정이야. 이야기를 좇잖아. 어떻게든 결말이 나지. 이야기가 결말이 난다는 건 문제를 풀었다는 뜻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