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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가면

1.
“낚시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난 그냥 술 마시러 가는 거지요. 언제 날 잡아서 놀러 와요. 같이 가보게.”
“궁금해요. 바다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낚시를 몰라서.”
“고기는 못 잡을 때가 더 많답니다.”

2.
“어제 물어보려 했는데, 예전에도 이런 시도 한 적 있지 않아요?
“한두 번 했었는데 말은 안 걸었어요.”
“그러셨구나.”
“그냥 구경만 하다가 한 2주일 지나서 다시 무섭고 그렇길래 탈퇴했지.”
“뭔가 새로운 걸 해보는 건 어때요? 환기도 시킬 겸.”
“뜨개질 모임 가입했다고요.”
“아, 뜨개질. 지구력이 좋아요? 재미가 있어서인가.”
“아는 분이 추천해줬어요. 그리고 어제 생각한 건데, 이렇게 또 무섭고 불안해지면 빨리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괴롭힐 사람을 만들던가.”
“죄지었냐고요. 왜 그렇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나 싫어할까 봐, 가까이 가면 피해 줄까 봐 걱정도 됐고.”
“무슨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어요?”
“성장의 비밀은 몇 개 있었는데.”
“그런 건 죄지었을 때나 느끼는 건데.”
“그냥 쌓아 두고 있던 게 폭발했나 봐요. 아닌 척하고도 잘 살았는데. 예전엔 별거 아니었던 일도 하나씩 생각나고, 그렇게 피해줬구나, 언젠가 이렇게 벌 받는 거다, 내가 사람들이랑 뭘 하겠나, 등등.”
“그대도 참 파란만장하오.”
“민지님은 대놓고 보이는 괴로움이 많았을 거고 난 숨기고 산 게 너무 많았어요. 그게 혼자 병을 만든 것 같아요.”
“그래 보여요.”
“가면도 많았고. 오늘은 또 어떤 척해볼까 매일 고민하다가 망치고.”
“사람 한 번에 바뀔 수 있나요. 숨긴 것들도 하나씩 토해내 봐요. 내가 보기엔 그동안 값은 다 치른 것 같은데.”
“그 얘기 몇 번 해줘서 좋았어요.”
“완벽하면 부처지 뭐. 그리고 가면은 누구나 있는 거 아닙니까. 나도 알고 보면 무식한 핵폭탄인데.”
“그러면 다행이고요.”

3.
“사람 만나는 것도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봐요. 사기도 당해 보고 싸워도 보고 욕도 해보고, 그러다 좋게 지내기도 해보고. 그러면서도 남은 사람이 결국 친구 아닐까. 하여튼 그동안 방황한 거로 과거까진 모르겠으나 힘들었던 건 청산했다 쳐요. 내 명을 걸고 그만하면 충분하니 그러지 말아요.”
“그렇다고 해봅시다.”
“대가라면 그건 다 치렀겠지 뭐. 이제 우리 철듭시다.”
“난 철들기 싫은데. 먼저 들어봐요. 보고 괜찮으면 나도 들게.”
“체질인갑소. 7살 떼쟁이가.”

900레벨

“이 게임 오랜만에 해보다가 친구 목록을 봤는데, (사진) 무슨 레벨이 이렇게 높아요? 아 저건 메달이구나. 레벨은 더 하네.”
“나 그거 안 한 지 오백 년 됐는데. 아직 1위라니 뿌듯하네.”
“저 몇 년 전 처음 탈퇴할 때 카카오 계정 자체를 지웠더니 게임 기록도 다 날아갔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계정을 지우니까 당연히 기록도 날아가지.”
“아, 그런가.”
“바보. 인증번호 변경은 무슨 말이에요?”
“몰라요. 제가 말 걸면 그게 뜬대요. 하도 들락날락해서 요주의 계정인가 봅니다.”
“보이스 피싱이에요?”
“조심해요.”
“웃겨.”
“아침마다 사람들한테 말 걸고 인사하는 거 재미있어요.”
“친구 없잖아요.”
“생각만큼 죄를 짓진 않았나 봅니다.”
“무관심했겠지.”

드라이브 가는 날

“○○님은 본인이 여우 같다는 거 알아요?”
“제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던데. 근데 어느 부분이요? 여우 같다는 게 뭐예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한 번씩 되게 얄밉다고 해야 하나.”
“저는 곰입니다. 일단 게을러요.”
“게으르다고 다 곰인가. 지금도 표정 새침한 거 모르죠.”
“난 아무 표정 안 지었는데요.”
“본인은 모르지. 그래서 우리 어디 가요?”
“가보고 싶었던 곳 있어요?”
“저는 아는 데가 없어서. ○○님 좋아하는 곳 보여줘요.”
“그럼 바퀴 닿는 곳으로. 배는 안 고파요?”
“조금? 아직은 괜찮아요.”

“뒷자리에 과자 있는데. 먹을래요?”
“차에서 뭐 먹어도 돼요?”
“흘리지만 않으면.”
“안 먹을래요.”
“괜찮아요. 여기 봉지 있어.”
“대고 먹으라고요?”
“아니, 이건 쓰레기 봉지고.”
“목마르지 않아요?”
“휴게소 나오면 갑시다.”
“네. 배도 좀 고프고.”
“밥은 도착해서 먹을 건데.”
“얼마나 남았어요?”
“안 막히면 한 시간.”
“과자 먹을게요.”

고상한 난봉꾼

“어찌 살고 계시우?”
“고상한 척하면서 미쳐갑니다.”
“왜요?”
“그냥 뭐.”
“개발자 기본 요건이 반쯤 미치는 거라던데, 그래도 정상인인 척할 수는 있잖수?”
“노력은 해요. 지금은 어디쯤입니까?”
“동경 124도 북위 6.5도, 목적지는 광양. 어떻게, 인생의 반쪽은 찾으셨고?”
“아뇨. 찾았나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
“왜요?”
“글쎄요. 필리핀 근처군요. 우리랑 시차도 거의 없겠는데, 많아 봐야 한 시간?”
“오늘 저녁에 한국 시각이랑 맞출 거라우.”
“재미있는 삶이네.”
“배 타시려우?”
“궁금해서 가끔 찾아봐요. 근데 뭐 아는 것도 없고 비슷한 경력도 없으니.”
“인터넷 속도가 초당 최대 1M인 건 함정.”
“좋군요. 헛짓거리 안 하고.”
“핑 700ms는 기본.”
“백과사전 정독할 수 있겠는데요.”
“백과사전을 읽기엔 일이 많은 것도 함정.”
“거기선 스트레스를 뭐로 풉니까? 매일 같은 사람, 같은 환경, 같은 풍경.”
“풀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한동안 그 방에 눌러살았잖아.”
“게다가 간부면 마음 나누기도 어렵겠다. 오늘은 뭐 먹었어요?”
“떡만둣국이요. 징하다 진짜.”
“왜요? 맛있었겠는데.”
“맛없으니 징하지.”
“우리나라에 와서 쉬다가 다시 출항하면 선원도 바뀌고 그래요?”
“타고 있는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바뀌지요. 다음 휴가 지나면 다른 배를 탈 테고.”
“다음번 쉬는 건 언제인가요?”
“9월쯤이지 싶어요.”
“멀구나. 필리핀에서 광양에 왔다가 다시 또 어디 나갔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돈 벌어야지. 이번엔 광양 들렀다가 중국 들르고 호주 갔다가 다시 한국행이겠지요. 그리고 어딘가 한 번 더 다녀오면 휴가. 그렇지만 여행은 아닌 게 함정.”
“이번에 휴가 나오면 꼭 봐야지. 뱃사람은 뭐 하고 사나 인터뷰 땁니다.”
“기회 되면 봅시다. 게으른 일상 뭣이 그리 궁금 타고요.”
“세상 신기한 직업이니까요.”
“그럼 온라인 인터뷰 고고.”
“타자 치는 거로는 맛이 안 나요. 리듬 살려 들어야지.”
“그나저나 ○○님도 어서 짝을 만나야 할 텐데.”
“저는 뭐.”
“어딘가 마음 정착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모르겠어요. 그랬다가 말았다가 해서. 말은 아니라지만, 혼자 살 위인은 아닌 게 분명해요.”
“그걸 이제 알았수?”
“고상한 척 좀 그만해야지.”
“고상해도 ○○님이고 난봉이어도 ○○님이고. 나연씨가 안 보이니 섭섭하긴 하네.”
“나연님 큰 사건 하나 터뜨리고 사라졌어요.”
“왓더? 나연씨가?”
“내 심심할 때 썰 풀어드리지. 그게 사건까지 되는지는 관점 따라 다르겠지만.”
“걔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뭐, 간이 좀 큰 분이었던 걸로.”
“지금 당장, 릴리즈 플리즈.”
“지금은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요. 오랜만에 회포를 푸니 기분이 나아집니다. 기다려 보시오. 곧 얘기해줄 테니.”
“민지님은 어디?”
“그분은 따로 방에 있어요. 비둘기로 검색하면 나오는데.”
“됐수. 요 배가 삼천포를 드나들어서,”
“거기도 큰 배가 들어갈 수 있군요.”
“그냥 민지님이 생각나긴 했는디.”
“올가을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삼천포에?”
“네. 어떻게 지내나 봐야지.”
“사람 사는 게 뭐 있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