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Blog

무명 다비드

창 한쪽 구석에서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반대편 구석으로 사라진다. 방이 해를 삼키는 시간이다. 내가 누운 자리에서는 앞집 옥상이 보인다. 오늘은 모자를 쓴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남자는 머리가 덥수룩해서 얼핏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 평소 같으면 방정맞게 움직였을 빨래가 오늘은 곱게 매달려 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날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옥상에 올라온다. 하지만 건너편 집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방 한쪽 구석에서 조각상의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다비드.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었지만, 생김새가 영 달라서 무명으로 남겨 두었다. 이름 없는 조각상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옷을 반쯤 걸치고 있다. 나는 포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글자를 그리다가 선을 하나 잘못 그어서 이를 어쩌나 싶던 중 그냥 누워버렸다. 어느 책에선가 본 문구를 쓰고 싶었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포스터는 무명 다비드 뒤에 붙일 예정이었다. 그래서 다비드를 볼 때마다 이 글을 발견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조각에 이름이 없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때때로 생각하는 것도 소음이 된다. 그러면 나는 불안해져서 돌아누웠다가 앉았다가 한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 입니다. 나는 내일을 바라지 않는데 누군가는 내일을 그토록 원하는구나. 내가 오늘을 아무렇게나 보내면 그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게 될까. 만일 나에게 내일이 없다면 그 하루는 누가 갖게 될까. 포스터 작업을 마저 해야겠다. 잘못 그린 선은 원래 의도였던 것처럼 강조해봐야겠다.

부처의 가면

1.
“낚시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난 그냥 술 마시러 가는 거지요. 언제 날 잡아서 놀러 와요. 같이 가보게.”
“궁금해요. 바다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낚시를 몰라서.”
“고기는 못 잡을 때가 더 많답니다.”

2.
“어제 물어보려 했는데, 예전에도 이런 시도 한 적 있지 않아요?
“한두 번 했었는데 말은 안 걸었어요.”
“그러셨구나.”
“그냥 구경만 하다가 한 2주일 지나서 다시 무섭고 그렇길래 탈퇴했지.”
“뭔가 새로운 걸 해보는 건 어때요? 환기도 시킬 겸.”
“뜨개질 모임 가입했다고요.”
“아, 뜨개질. 지구력이 좋아요? 재미가 있어서인가.”
“아는 분이 추천해줬어요. 그리고 어제 생각한 건데, 이렇게 또 무섭고 불안해지면 빨리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괴롭힐 사람을 만들던가.”
“죄지었냐고요. 왜 그렇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나 싫어할까 봐, 가까이 가면 피해 줄까 봐 걱정도 됐고.”
“무슨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어요?”
“성장의 비밀은 몇 개 있었는데.”
“그런 건 죄지었을 때나 느끼는 건데.”
“그냥 쌓아 두고 있던 게 폭발했나 봐요. 아닌 척하고도 잘 살았는데. 예전엔 별거 아니었던 일도 하나씩 생각나고, 그렇게 피해줬구나, 언젠가 이렇게 벌 받는 거다, 내가 사람들이랑 뭘 하겠나, 등등.”
“그대도 참 파란만장하오.”
“민지님은 대놓고 보이는 괴로움이 많았을 거고 난 숨기고 산 게 너무 많았어요. 그게 혼자 병을 만든 것 같아요.”
“그래 보여요.”
“가면도 많았고. 오늘은 또 어떤 척해볼까 매일 고민하다가 망치고.”
“사람 한 번에 바뀔 수 있나요. 숨긴 것들도 하나씩 토해내 봐요. 내가 보기엔 그동안 값은 다 치른 것 같은데.”
“그 얘기 몇 번 해줘서 좋았어요.”
“완벽하면 부처지 뭐. 그리고 가면은 누구나 있는 거 아닙니까. 나도 알고 보면 무식한 핵폭탄인데.”
“그러면 다행이고요.”

3.
“사람 만나는 것도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봐요. 사기도 당해 보고 싸워도 보고 욕도 해보고, 그러다 좋게 지내기도 해보고. 그러면서도 남은 사람이 결국 친구 아닐까. 하여튼 그동안 방황한 거로 과거까진 모르겠으나 힘들었던 건 청산했다 쳐요. 내 명을 걸고 그만하면 충분하니 그러지 말아요.”
“그렇다고 해봅시다.”
“대가라면 그건 다 치렀겠지 뭐. 이제 우리 철듭시다.”
“난 철들기 싫은데. 먼저 들어봐요. 보고 괜찮으면 나도 들게.”
“체질인갑소. 7살 떼쟁이가.”

900레벨

“이 게임 오랜만에 해보다가 친구 목록을 봤는데, (사진) 무슨 레벨이 이렇게 높아요? 아 저건 메달이구나. 레벨은 더 하네.”
“나 그거 안 한 지 오백 년 됐는데. 아직 1위라니 뿌듯하네.”
“저 몇 년 전 처음 탈퇴할 때 카카오 계정 자체를 지웠더니 게임 기록도 다 날아갔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계정을 지우니까 당연히 기록도 날아가지.”
“아, 그런가.”
“바보. 인증번호 변경은 무슨 말이에요?”
“몰라요. 제가 말 걸면 그게 뜬대요. 하도 들락날락해서 요주의 계정인가 봅니다.”
“보이스 피싱이에요?”
“조심해요.”
“웃겨.”
“아침마다 사람들한테 말 걸고 인사하는 거 재미있어요.”
“친구 없잖아요.”
“생각만큼 죄를 짓진 않았나 봅니다.”
“무관심했겠지.”

배고픔에 관하여

사람의 배고픔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냉장고의 존재다. 사람은 기계와 같은 움직임으로 침대를 벗어나 슬리퍼를 찾아 신는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걷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어두울 때면 두 팔을 크게 저어가면서 냉장고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익숙한 문고리에 손이 닿으면, 그대로 쥐고 당긴다. 이제 냉장고에서는 빛이 쏟아진다. 각종 음료와 물, 아무튼 마실 것들이 밝은 빛 아래에서 사람을 반긴다. 그리고 사람은 목을 축인다. 그리고 목을 축인다. 그리고 계속 축이다가 조금 살만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사람은 탄수화물을 찾는다. 어떤 날은 빵, 또 어떤 날은 밥, 아침부터 밥을 먹는 날도 있다, 언제는 초콜릿, 혹은 어제 먹고 남은 피자, 그날그날 다양한 음식이 사람의 선택을 기다린다. 가끔 운이 좋으면 데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준비돼있기도 하다. 엘렌 코트는 아침에 빵 대신 시를 먹으라고 했는데, 뭐 이런 생각이 들면 목을 축인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시기에 드는 생각인데 실제로 경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의 육체가 배고픔을 잊으면 이제 정신이 배가 고플 차례다. 정신의 배고픔은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그리고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면 그 부분까지, 몸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모든 유기 회로로 퍼진다. 사람의 정신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새롭다는 것은 어제와 다른 것, 최고의 것, 더 끝내주는 것, 그리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흥분감을 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정신은 그런 새로움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육체가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해가 뜨기 전부터 떠나 있다가 점심이 될 때쯤 돌아오거나 해가 저물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돌아온다. 가끔 너무 멀리 간 탓에 며칠 동안 소식이 없기도 하다. 이럴 때 사람은 정신이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같은 생각을 하다가 불면증에 빠지곤 한다. 사람은 그의 앞길이 맑고 평온하기만을 바란다. 별것 아니더라도 오늘 일은 오늘 모두 마무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매일 밤 이름 없는 신에게 기도를 바친다. 내일은 온화한 하루를 맞게 해주세요. 부디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게 해주세요. 사람은 늘 배가 고파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공허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잠시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 온다. 사람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어딘가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천천히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