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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다

주공 8단지요. 여기 온 지는 사 년쯤 됐어요. 이사할 시기는 지났는데 가끔 불안해져요. 몸이 안다잖아요. 가까운 곳에 들판이 있거든요. 풀이 많이 자라는데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잘라줘도 금세 다시 나곤 해요. 이름이 뭐라더라. 한 해 걸러 이 년에 한 번씩 철새도 오고요. 궁금하신 것 같아서요. 목소리는 낮춰주세요. 둘만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아니거든요. 헬렌 오수세나. 풀 이름이요. 여기서는 다들 이렇게 불러요.

옛날에는 별이 많이 떴대요. 안내판은 없지만 길이 쉬워서 괜찮을 거예요. 해가 지기 전에는 오셔야 해요. 행사가 있거든요. 음료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시고요. 저는 그냥 머물고 있어요. 처음엔 호기심이었는데 지내다 보니 적응이 돼서요. 갈 곳이 없지는 않은데 편하기도 하고요. 다들 비슷할걸요. 음악은 괜찮아요? 여기 관리하시는 분이 힙합을 좋아해서요. 다른 걸 틀어도 오다가다 들러서 바꾸시곤 해요. 헬렌 오수세나. 필요할 때 이걸로 불러주세요. 불안하진 않죠? 젖은 땅이 있으니까 여기, 장화 신으시고요. 이따 봐요.

빨간 바다

열두 시. 저녁에 비가 온다고 했다.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고를 반복한다. 커튼 뒤로 바람이 분다. 눈을 감으면 빨간 점이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점은 선이 되었다가 면이 되고, 다시 선이 되었다가 점으로 돌아온다. 커튼 너머로 자동차 소리를 듣는다. 그림자가 방을 한참 덮더니 사라진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고 아직 남아있는 온기를 찾는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라.

꽃가루가 날아든다. 기침을 참아 본다.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면 점들이 꽃을 피운다. 커튼 너머로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앞집 벨을 누르고 있다.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식어가는 피부를 찾는다. 세 시. 눈을 뜬다. 커튼 뒤로 자동차가 지나간다. 소리가 육중한 걸 보니 트럭이다. 눈을 감으면 파란 점이 무수한 선을 만들다가 사라지고, 다시 점이 되어 나타났다가 선을 만든다. 바다야 울지 마라. 도시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단다. 힘내라 우리 아가, 힘내라.

울타리의 생명력

꿈에서 학교 안을 헤매고 있었다. 강의실을 찾아가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침을 뱉는다. 벌써 소문이 퍼졌나 싶어 모르는 척을 했다. 팔에 묻은 침을 닦으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다락방을 발견한다. 아무도 오지 않겠지 싶어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든다. 다시 눈을 뜨니 완도항 앞이다. 나는 부산하게 이 가게 저 가게를 드나들고 있다. 반소매를 입었더니 춥네, 생각하면서 가게 밖을 보는데 바다가 얼어 있다. 파도가 치다 만 상태로 얼어서 바다는 굴곡을 그린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겪는 이야기라고, 가게 주인이 말한다. 하필 이런 이야기는 생명력도 주인을 닮아서 질기고 고집스럽단다. 꿈속에서 나는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어떤 속담은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잃었다는 건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니냐고, 빈 종이에 대고 묻는다. 오랜만에 머리를 풀었더니 거울이 반갑다. 의도로 보일 만한 건 모두 없애야 했다. 애초에 내게 뭘 알려준 이도 없었으니 추측만 할 뿐이다. 쉽게 들리는 이야기는 넘겨짚기도 쉽고 기억을 스치기도 금방이다. 부서진 울타리를 보면서 지난 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집중을 조금 덜 했다면 좋았을까 물었더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본래 취미라서 괜찮다고 했다.

저기요

“그냥, 한 번 따로 뵙고 싶었어요.”
“잘했습니다.”
“주말마다 오시는 거예요?”
“네. 쉬는 날마다, 별일 없으면요.”
“이렇게 보니까 어때요?”
“반가워요. 신기하기도 하고.”
“신기하다고요, 어떤 게요?”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까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름 불러요. ○○님. 아니면 저기요.”
“아, 네. 저기요. 이렇게 부르면 되나요?”
“네. 저기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