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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주제를 얻으려고 애를 쓴 적이 있다. 무얼 그릴지 어디로 갈지, 다음 열정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사람을 만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했다. 진담이든 농이든 나에게 하는 얘기라면 뭐든 듣고 싶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그런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겼지만 이야기를 나누기엔 정신적 거리가 멀었다. 나는 항상 목이 말랐고, 주변에 비슷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렇긴 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흔치 않아서 우리는 종종 외로워한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열정을 잊게 만든다.

삶의 흐름을 깨고 싶었던 적이 있다. 열정만 있으면 언젠가는 삶이 달라질 거라 믿었다. 열정은 주제로 대변된다 생각했고, 이 주제를 찾기 위해 만남을 구걸하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열정 섞인 사람을 본다. 내게 소소한 이야기를 쉽게 잘 던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제 서너 가지 중 하나는 안다. 기대하는 만큼 증발하기도 쉽다는 것. 한번 넓게 본 세상을 다시 좁히기는 힘들 테니 나는 세상을 넓게 보지 않으려 한다.

가면

행복한 사람은 말이 없다. 표정 변화도 없으며 웬만해서는 웃는 일도 없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언젠가부터 매일 보는 사이가 됐는데 인사를 제대로 나눈 기억은 없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두세 달을 알고 지냈는데 워낙 변화가 없으니 작은 손짓 하나에도 집중하게 된다. ‘알고 지냈다’라고 해서 친하다거나 이야기를 곧잘 나누는 사이라는 건 아니다. 눈을 마주치기도 쉽지 않아 대화를 하려면 매번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듬성듬성 마주치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봐도 그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행복한 사람은 자리에 앉으면 누가 부르기 전까지 일어나는 법이 없다. 일이 마무리되거나 퇴근 시간이 오지 않는 한 그는 굳은 석상이 되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일어나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다. 매일 옷을 바꿔 입고 새로운 표정을 연구하고 새 미사여구를 써보려 노력하지만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 번은 옆 동네 행복한 그가 생각나지만 내일도 만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기억이 흐릿한 만큼 그에게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메아리

바람이 분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매서워진다. 흙먼지가 날리고 나뭇가지가 춤을 춘다. 하천은 고사하고 웅덩이도 보기 힘든 동네에 물이 들이친다. 식사하셨어요? 길 가던 사람이 묻는다. 회사에 도착하면 먹을 겁니다. 회사가 아직 있을까요? 간밤에 태풍이 쓸어갔을지 모릅니다. 태풍이라고요? 여기 태풍이 왔었습니까? 서두르십시오. 곧 도로가 차단됩니다. 온 골목이 기괴한 소리로 가득하다. 회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는 바람이 잠잠해지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아침을 먹게 되면 제 생각도 잠시 해주십시오. 엔진 예열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달린다. 터널을 지나니 바람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세상모르게 잤더니 개운하다.

믿고 하는 거래

평생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방향을 바꿔도 좋습니다. 나 자신을 믿는 만큼 당신을 믿습니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항상 깨어 있겠습니다. 나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말이 없어도 생각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아직 영웅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나를 믿으십시오. 말이 없더라도 수다꾼을 대하듯 표정을 들어주십시오. 방향이 어긋나도 잘 가고 있는 척 응원해주십시오. 어제와 오늘이 다른 날인 것처럼 나는 내일 새로운 사람이 될 겁니다. 그래도 변함없는 웃음을 주십시오. 새삼스럽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네요. 마지막으로, 매일 오 분씩만 나와 이야기를 나눠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