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세 시에 느낀 감정을 지금 떠올릴 수 있느냐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어제 오후 무슨 생각을 했나 일일이 기억할 수 없으니 대강 이런 느낌이겠지, 단정 지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이번 주말은 심심함이 덜하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건 어쨌든 시각적으로 외로운 일은 아니다. 어제의 일과는 오늘과 비슷했던 걸로 포장하면 그만이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사투를 이겨낸 승자가 된다. 하루의 계획 같은 건 없지만 일조량과 바람 세기에 따라 주인 없는 각본은 생긴다. 집에서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로의 유목민이 되든,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음 기분의 재료가 된다. 오랜만에 주말 출근을 했더니 갑자기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내일 오후가 되면 오늘 저녁 여덟 시에 느낀 감정을 짜내어 다시 입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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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네가 나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네가 곁에 있는지 몰랐다. 내가 너를 볼 때마다 너는 신나게 웃고 있었고, 네가 누군가를 부를 때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나는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불러본 적이 없다. 너는 언제나 유쾌한 사람이지만 나는 너를 웃긴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멀리 있고 너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 너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다 했지만 내가 본 너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바라보는 거울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알 수 없다. 내가 잠이 들면 네 하루가 시작되고, 네 여행이 끝나면 나는 다음 목적지를 고른다. 너와 나의 운명은 우주의 규칙과는 조금 다르다.
상상력
내가 사는 집은 방 하나가 남동향, 나머지 방들과 거실이 남서향이라 오전과 오후의 증거가 확실하다. 남동향으로 창이 난 방은 ‘아카이브’라 불리는데 이곳에 빛이 드는 건 아침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주말 아카이브’의 아침을 봤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이 빠른 속도로 내 상상력을 잠식해갔지만 나는 몰랐다. 며칠 지나고 보니 상상을 축내는 대신 내 하루를 바꾸고 있었더라. 차를 달려 눈바람 치는 섬에 도착해 아직 중천이 먼 해를 본다. 사실 구름에 가려 저기쯤 있겠지 상상만 했다. 서울은 맑고 화창했다는데 내가 간 곳들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남쪽 동네도 겨울은 겨울이다.
‘주말 아카이브’의 아침을 맞이한 토요일부터 다음 날인 일요일, 그리고 다시 돌아온 토요일까지 삼일 동안 이천 킬로미터를 달렸다. 왠지 오래전부터 반복돼 오던 일 같다.
희준
“왜 그랬어?”
“뭘?”
“아까 식당에서.”
“계산?”
“전화 왔잖아.”
“아, 그러게. 무슨 생각이지?”
“아니. 걔 말고 너.”
“응?”
“나까지 미안해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자주 그런다며?”
“야, 누구 놀리냐?”
“진지하게 묻는 거야. 너만 사람이니?”
“아니, 잠깐만.”
“내가 왜 자꾸 보자는 줄 알아?”
“미진아.”
“간다. 전화해.”
“야, 차는?”
“됐어. 걸어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