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가려움

너의 아침을 사랑했던 적이 있다. 꿈이 지나간 빈자리를 감당하기 싫어서 너는 잠에서 깨면 바로 침대를 벗어난다고 했다. 미련 같은 건 두지 말자고, 애를 써도 언젠간 다 잊힌다고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막 도망친 꿈이 머리에서 증발하는 것을 본다. 에어컨 바람을 피해 몸을 감싼 이불 속에서 나는 최대한 작아진다. 찬 바람은 막았지만 가려움이 몸을 덮는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너는 그리움을 모른다 했으니 네가 떠나고 남은 이 감정도 그리움일 리는 없다. 사람들의 무기력이 요즘 내 식욕을 병들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몸을 더 작게 웅크린다. 가려움은 등을 지나 허벅지와 종아리로 퍼진다. 나는 너의 허무도 사랑했던 적이 있다. 그 감정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허무하게 보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서야, 내가 안다고 떠드는 이야기들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잠시 풀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조금 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리움을 잊었다.

적응하다

주공 8단지요. 여기 온 지는 사 년쯤 됐어요. 이사할 시기는 지났는데 가끔 불안해져요. 몸이 안다잖아요. 가까운 곳에 들판이 있거든요. 풀이 많이 자라는데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잘라줘도 금세 다시 나곤 해요. 이름이 뭐라더라. 한 해 걸러 이 년에 한 번씩 철새도 오고요. 궁금하신 것 같아서요. 목소리는 낮춰주세요. 둘만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아니거든요. 헬렌 오수세나. 풀 이름이요. 여기서는 다들 이렇게 불러요.

옛날에는 별이 많이 떴대요. 안내판은 없지만 길이 쉬워서 괜찮을 거예요. 해가 지기 전에는 오셔야 해요. 행사가 있거든요. 음료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시고요. 저는 그냥 머물고 있어요. 처음엔 호기심이었는데 지내다 보니 적응이 돼서요. 갈 곳이 없지는 않은데 편하기도 하고요. 다들 비슷할걸요. 음악은 괜찮아요? 여기 관리하시는 분이 힙합을 좋아해서요. 다른 걸 틀어도 오다가다 들러서 바꾸시곤 해요. 헬렌 오수세나. 필요할 때 이걸로 불러주세요. 불안하진 않죠? 젖은 땅이 있으니까 여기, 장화 신으시고요. 이따 봐요.

빨간 바다

열두 시. 저녁에 비가 온다고 했다.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고를 반복한다. 커튼 뒤로 바람이 분다. 눈을 감으면 빨간 점이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점은 선이 되었다가 면이 되고, 다시 선이 되었다가 점으로 돌아온다. 커튼 너머로 자동차 소리를 듣는다. 그림자가 방을 한참 덮더니 사라진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고 아직 남아있는 온기를 찾는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라.

꽃가루가 날아든다. 기침을 참아 본다.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면 점들이 꽃을 피운다. 커튼 너머로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앞집 벨을 누르고 있다.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식어가는 피부를 찾는다. 세 시. 눈을 뜬다. 커튼 뒤로 자동차가 지나간다. 소리가 육중한 걸 보니 트럭이다. 눈을 감으면 파란 점이 무수한 선을 만들다가 사라지고, 다시 점이 되어 나타났다가 선을 만든다. 바다야 울지 마라. 도시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단다. 힘내라 우리 아가, 힘내라.

사유하는 가죽

사유하는 자는 두려움을 모른다. 이름 모를 동물은 자신의 가죽을 들고 거울 앞에 선다. 뻣뻣한 털 아래로 온기가 남아 있다. 눈이 눈을 보고 입이 입을 말한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가죽이 빈 공기에 대고 묻는다. 거울 위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이 웃는다. 두려운 자는 생각하는 법을 잊었다. 동물은 비스듬히 서서 자신의 털을 고른다. 제 이름부터 알려 주십시오. 쓰고 남은 것이라도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거울 앞에 선 자는 부끄러움을 참는다. 주인 없는 가죽이 온기를 잃어간다.

페일 그린이라고 합니다. 그 색깔이오. 저는 어둡게 하고 싶었는데 전 주인이 반대해서요. 거울은 유리만 갈면 감쪽같을 겁니다. 산 지도 얼마 안 돼서 거의 새것이거든요. 후덥지근하죠? 이 방이 환기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문을 꼭 열어두어야 해요. 밖에 걸린 건 이따 오후에 치울 겁니다. 인부가 오기로 했어요. 냄새는 금방 빠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마 큰 동물을 키웠던가 봅니다. 청소는 한 번 더 해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