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선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순간적으로 무지개가 보인다거나, 밥을 먹다가 목이 말라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게 맥주라서 갑자기 밥과 맥주를 함께 먹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우연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고 치이는 것들이 몇 있다. 우리는 그걸 일상이라고 부른다. 어차피 모든 일은 우연이지만, 내가 보고 만지는 것, 내 의지가 담겼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부르면서 내 하루, 내 시간, 내 일기에 포함되는 어떤 중요한 사건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수없이 놓치는 많은 것 중 겨우 몇 가지를 붙들고서 이게 나야, 이게 내 감정이고 내 모습이야, 라고 말하지만 그게 진짜 ‘나’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답을 찾지 못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단편적인 사건들의 모음이 곧 일상이라면 삶 자체도 거대한 우연인 셈인데 우리는 거기에 왜 그렇게 많은 이유를 붙이고 감정을 쏟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아파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우연이면 뭐가 되었든 그냥 흘려보내도 상관없을 텐데 왜 그러지 못하는지, 왜 때로는 무겁다고 느끼는지 알고 싶다. 어떤 시간은 딱히 찾아오지 않아서 텅 비기도 하며 이렇게 빈 시간은 다시 채워지지 않아서 우리를 힘들게 한다. 나는 이따금 예고 없이 찾아든 생각을 글로 남기면서 이게 내 일상인가 보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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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시장
지난 주말,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을 만났다. 옆자리가 비어서 앉았을 뿐인데 ‘기다리고 있었다, 잘 왔다’면서 내 손을 덥석 잡은 노인은 거의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부터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학교는 어딜 다녔느냐, 지금 사는 곳은 어디냐, 형제자매가 있느냐, 결혼은 하였느냐, 지금은 어딜 가느냐 등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그러는 동안 나는 네, 아니오, 어디 다닙니다, 어디에 삽니다, 같은 대답을 역시 쉬지 않고 했다. 그래도 나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다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말씀해주세요, 다시요, 하고 되묻고는 최대한 대답해드리려고 애썼다. 버스가 종로5가를 지날 때쯤 노인은 ‘내려야겠다’면서 벨을 누르고 창밖을 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노인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버스가 동대문시장에 도착하자 노인은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출입문을 향해 갔다.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나는 질문을 받기만 했을 뿐 노인에게 뭔가 물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등 뒤에 대고 조심히 가세요, 하고 말했는데 노인은 버스에서 내리느라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말에 잠깐 웃는 것도 같았다. 잠시 후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창밖에 선 노인은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시끄러운 탓에 거의 들리지는 않았지만, 노인의 입 모양은 마치 ‘잘 가, 언제 또 놀러 와’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노인을 향해 덩달아 손을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주말 고민
“나 올해 계획 중 하나가 주말마다 청소하기였거든. 구석구석 먼지도 털고.”
“청소 안 한 지 오래됐다며.”
“응. 계획이긴 했으나, 귀찮기도 했고.”
“요즘도 집에 잘 안 있지?”
“나 집에 있는 거 싫어하잖아.”
“책은 계속 봐?”
“아니. 두세 달 전부터 책도 재미없어져서,”
“네가 소설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래도 노력은 하는데 잘 안 되네. 응, 난 소설. 책 읽는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고.”
“너 사는 게 지루하구나.”
“그런가, 모르겠어. 뭐든 집중할 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맞아. 나도 요즘 뭐 재밌는 거 없나 계속 찾아봐.”
“마땅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러게. 궁금한 것도 없잖아.”
“응. 딱히.”
심리적 친근감
저는 호수 근처에 살아요. 롯데월드 있는 쪽, 서호라고 하던가요? 직선거리로 200미터쯤 되는 것 같아요. 제 방에서 자이로드롭이 보인답니다. 혹시 타보셨나요? 주말마다 롯데월드에 사람들이 많을 거잖아요. 그럼 제 방으로도 기구 타는 소리가 들려와요. 특히 자이로드롭 떨어질 때, 사람들 꺅하는 소리요. 저는 타본 적은 없지만 하도 봤더니 어떤 느낌인지 이미 알 것 같아요. 이 동네 종종 오신다니 왠지 반갑습니다. 마주친 적은 없더라도 괜히 그런 느낌 있잖아요. 친근감이랄까. 저만 그런지 모르겠어요. 수현님 사는 동네도 여기에서 꽤 가까워요. 잠실대교 건너면 바로라서. 가끔 이마트 갈 일 있으면 그 동네로 가거든요. 같은 건물에 롯데시네마가 있던가. 맞죠? 저 거기에서 영화도 종종 봤어요. 그런데 수현님네 동네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술, 먹을 것도 많지만 ‘마실 것’도 많은 곳이었어요. 무슨 모임 한다고 하면 거의 ○○에서 보자, 했으니까요. 그럼 우리 다음에는 어디에서 볼까요? 이곳 호숫가에는 뭐가 딱히 있진 않아서 시간을 오래 보내기엔 난감해요. 근처 방이동에는 먹거리가 많으니 거기에서 봐도 좋고요. 혹은 걷는 거 좋아하시면 같이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아요. 가보고 싶었던 곳 있으면 얘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