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화장은 무슨.”
“그래도 그렇지.”
“넌 세수하고 난 다음이 제일 예뻐.”
“웃겨. 그럼 나 모자 쓰고 간다?”
“대충 나와. 팔 아프다.”
“얼마나 산 거야, 또.”
“널 위한 내 마음 아니겠니.”
“반포, 맞지?”
“응. 근데 돗자리가 없는데,”
“그때 그 편의점 있잖아. 왜, 의자 있고.”
“아, 맞다. 거기 있을게, 그럼.”
“버스 없는 거 아니겠지?”
“너희 집 앞에서는 웬만하면 다 갈걸.”
“그런가. 나 못 찾으면 데리러 오는 거다.”
“한강공원 무시하지 마라, 너.”
“치. 말 돌리기는.”
“간판 잘 보고, 방송 잘 듣고.”
“알았거든요.”
Category: Random
밤 소풍
브라우니
브라우니, 달다. 거의 모든 카페에서 볼 수 있다. 주 고객층은 20대 여성이지만 가끔 남자들이 사기도 한다. 아마 선물이거나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이름의 유래는 모른다. 작년 가을부터 진열대에 두지 않았는데 가끔 물어오는 손님이 있다. 카페를 시작할 때부터 팔고 있었지만 유독 선택되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다. 이 매장에 남자 손님이 많기는 하다. 그래서일까, 방향제를 아무리 뿌려도 산뜻한 향이 나지 않는다.
졸음을 쫓기 위해 허리를 펴고 있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테이블에 사람이 있으니 꽤 성공적인 오후 같지만, 테이블은 다섯 개뿐이다. 작고 아담한 공간이다. 1번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온다. 잠깐 앉아서 휴대폰만 보다가 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일찍 도착했다. 3번 테이블의 커플은 아까부터 서로를 노려본다. 일 분에 한마디쯤 하는 것 같다. 4번 테이블은 누군가 5번과 붙여 놓았는데 단체 모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경우 마감 시간인 9시까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2번 테이블은 비어 있고 나머지는 그냥 의자다. 잠깐 앉았다 가는 손님을 위해 두었는데 동네 주민이 와서 쉬기도 한다. 지금도 한 명이 앉아 있다.
어디선가 김치찌개 향이 난다. 누군가 밥으로 먹었나 보다. 다시 방향제를 뿌리지만 역시 향은 나지 않는다. 보라, 모든 테이블이 남자로 가득하다! 3번 테이블의 커플은 여전히 말이 없어서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야겠다. 지난주부터 브라우니를 다시 놓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거라면 여기에도 있어야, 그래야 손님도 안정을 찾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온다.
박제된 기억의 분실
오랜만에 사진관을 찾았다. 작년엔가 새로 생긴 곳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거울 앞에 서서 웃는 연습을 해본다. 머리를 매만지다가 안경을 벗을까 생각도 잠시 했다. 의자에 앉아 렌즈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묘하다. 어딘가 익숙한 긴장감이다. 언젠가부터 사진에 남겨지는 게 두려웠다. 어릴 땐 찍히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 한쪽에 박제된다는 사실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벽에 걸린 사진들에는 봄이 한창이다. 바깥 날씨만큼이나 사진관에도 햇살이 가득하다.
눈을 뜨니 오후 두 시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찾아오는 졸음은 커피로도 해결이 안 된다. 꿈에서 오랜만에 사진관을 찾았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활짝 웃는 얼굴에는 주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진 싫다는 사람이 잘도 웃었네, 생각하면서 탕비실을 찾았다. 요즘은 커피 대신 핫초코에 정을 붙이고 있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디선가 흘려들은 기억이 난다. 그건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부지런한 자의 몫이라고 했다. 행복의 원천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각자 ‘○○씨가 보는 세상’ 따위의 다큐멘터리 PD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매일 되뇌는 주문과도 조금 비슷하다. 나를 즐겁게 하라. 끊임없이, 나를 웃게 하는 이벤트를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
오래전 동료 중에는 미숫가루를 유난히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꼭 미숫가루를 머그잔에 두 숟갈 담아다가 물을 붓고 저으며 세상 온화한 미소를 지었는데, 지금 내 표정과도 비슷했던 것 같다.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의자 위에 개어둔 담요가 비실비실 웃고 있다. 꿈에서 남긴 사진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 계속 떠올린다. 카메라가 비추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사진에 나를 담는다는 건 가끔 슬픈 일이기도 하다. 박제된 기억 속에서 나는 웃고 있지만 꿈은 스쳐 갈 뿐, 오늘도 나는 기억을 분실하고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기대어 앉았다.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편지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며칠째 하늘이 맑다. 미움에 관해서는 이제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도 왜 너를 떠올리면 거부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다시 바스락 소리가 난다. 이번엔 바로 옆인 것 같다. 어디선가 읽기로 느티나무는, 잎이 넓은 타원을 그리는데 끝이 둥글단다. 청설모 한 마리가 바쁘게 지나간다. 편지의 글자가 춤을 춘다. 누군가 시간에 쫓겨 급히 쓴 것 같다. 나도 미움을 그리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생각하다가 고개를 든다. 구름이 느리게 지나간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난다. 연필을 깎다가 손이 조금 베었다. 반창고 대신 나뭇잎을 대고 끈으로 묶는다. 편지지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너를 처음 본 건 옷장에서 반소매 티를 막 꺼내던 때였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 어디서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미움을 잊었다. 너에 관해서도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도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것을 뜻한다고, 언젠가 너는 말했다. 내 마음은 아름드리야. 너는 나를 안을 수조차 없을걸. 청설모 한 마리가 바쁘게 지나간다. 잠시 손을 떨고 있었다. 날이 꽤 좋은데, 생각하다가 하늘을 본다. 구름이 멈추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