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고모가 다녀가서

그의 집은 옥탑방이어서 계단을 수없이 올라야 했다. 언젠가, 아직 몇 번 만나지 않았을 때쯤 그의 방에서 한 납부 고지서를 봤다. 주소는 그의 집이 맞는데 수신인이 달랐다. ‘황현주가 누구야?’라고 물었을 때 그는 ‘고모.’라고 답했지만, 그의 성은 황 씨가 아니었다. 그날 그의 방 한쪽 벽에는 머플러도 걸려 있었는데 그 물건 역시 ‘고모가 다녀가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한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씨 되시죠?”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저, ○○이 사귀는 사람입니다.”
“네?”
“○○이 많이 좋아하시죠? 죄송하지만, 그만 만나주셔야겠습니다.”
“누구시라고요?”
“그럼, 연락 그만해주세요.”

전화가 끊긴 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에서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들릴 뿐이었다. 먹다 남은 라면을 보는데 목이 막혀왔다. 한 시간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그였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며 우는 그에게 나는 그 여자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내가 ‘황현주야?’라고 묻자 짧게 ‘응.’이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세컨드도 아니고 써드, 동시에 만나는 세 번째 연인이었던 셈이다. 그것도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입고 있던 니트가 원망스러웠다.

빛나다

나는 날개야.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지. 내 정신이 살아있는 한 너에게 여행을 선물할 수 있어. 나는 네 자유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 네 마음이 바라보는 곳, 그게 어디든 난 미리 가서 응원하고 있을 거야. 나는 운동화야. 언제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지. 그러니 방향만 알려줘. 내가 지칠지언정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테니.

너는 내 별이야. 어두운 밤, 빛을 밝혀주지. 삶은 때때로 무섭지만 네가 어디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잠들 수 있어. 너는 부드러운 밀크티야. 네 삶엔 보석이 가득해. 그 보석은 검은색이지만 빛이 충만하지. 네 삶은 화려하기보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덤덤히, 맑게 빛나고 있어. 나는 매일 밤 별을 보면서 노래해. 나도 너처럼 어디엔가 있다는 걸, 그런 너를 보면서 빛나고 있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우리가 서로에게 날개가 되기를 희망해.

그건 아마

글씨 때문인 것 같다. 휘갈겨 쓴 이름이 유난히 멋져 보인 것은. 오랜만에 쥐는 펜 느낌이 어색하다. 언젠가 한가락 했던 것도 같은데, 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클립이 아직 남았을까. 서랍을 열고 손을 휘저어 본다. 박카스 뚜껑은 언제 이렇게도 모았나 모르겠다. 담당자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항상 삼십 분 내로는 답이 왔던 것 같은데. 뭐,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지. 어디선가 혜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거기에만 넣으란 법 있니? 답답하기는. 너 내년에도 이러고 있겠다.’ 오랜만에 쓴 이름이 웃고 있다. 일 년이 지났으니 그래, 네 말이 맞긴 맞았네. 잠시 기억을 지었다.

라면과 전봇대

“야, 닦아. 닦아.”
“오랜만에 하려니까 이게,”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래도 괜찮지? 맛은, 어때?”
“뭐, 봐줄 만해.”
“별로구나.”
“라면이 라면이지. 맛있다, 그래.”
“휴지도 없는데.”
“그러게 내가 한다니까.”
“나 적자란 말이야.”
“이번 달? 너 또,”
“그래도 예쁘지 않냐? 이거.”
“뭐, 전봇대야?”
“분위기하고는. 무드등이시란다.”
“무드-뭐? 참, 나 영지 봤다.”
“영지? 그 영지?”
“응. 왜, 그때 광화문에서,”
“잘 지내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