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그림 그리는 남자

홍 씨라고 했다. 모양새가 운동 좀 했겠다 싶은데 옷발이 무색이다. 충주에서만 이십칠 년, 서울은 이제 일 년 반 정도 되었단다. 키가 껑충해서 걷는 내내 그림자가 휘청인다. 잘 하는 게 뭐냐 물으니 그림을 그린단다. 화가는 아닌 듯싶은 게 남자치고 손이 곱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 글씨 쓰는 사람을 찾는다 하니 표정이 어두워진다. 한때 수묵화를 배운 적은 있으나 글씨와는 연이 없단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곧 연락 주겠다, 했지만 금세 잊었다. 적임자를 찾지 못해 사업도 흐지부지되었지만 가끔 생각이 난다. 그림을 그린다면 글씨도 곧잘 쓰지 않았을까.

충주는 팔 년 만이다. 먼 거리도 아닌데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오래전 서류에서 본 주소가 생각난다. 동네 이름이 특이해서 유래가 있냐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요즘도 그림을 그릴까 궁금하다.

거울

경쟁이 좋아서 사람들과 어울린다. 평가를 위해 만나고 분석을 위해 이야기를 듣는다. 서로 속상하면 기회가 줄어드니 미리 친해진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높낮이를 재는 기분이 좋다. 이 사람보다 못난 것도 좋고 저 일을 언젠가 해볼 수 있겠지 하는 망상도 좋다. 주위에 누군가 머무는 일은 흔치 않아서 필요할 때마다 찾아다녀야 한다. 밥 먹자, 술 마시자, 얘기 좀 하자, 오래 가진 않는다. 결국 취미와 같아서 곧 새로운 놀이를 찾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서 거둔 눈은 거울로 향한다. 어제 만난 사람은 어제의 강민형이고 내일 만날 사람은 내일의 홍진웅이다. 오늘은 김순태와 밥을 먹기로 했다. 매일 다른 이름을 지으면 항상 새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익숙함

어디 살아요? 여기는 송파동입니다. 가깝네요. 저는 문정동인데 곧 이사 가요. 아, 어디로요? 광주요. 경기도. 아시나요? 제 외갓집이 광주에 있어요. 아하. 사진은 본인이에요? 왜요? 아, 이상형입니다. 반가워요. 원래 빈말을 잘 해요? 저는 진심인데 사람들이 잘 안 믿네요. 그럴 것 같아요. 목소리 좋은 사람은 일단 의심부터 하라잖아요. 누가 그래요? 어릴 때 고모에게 들었어요. 가벼운 사람은 아니죠? 저는 모릅니다. 판단해주세요. 오늘 저녁 약속 없으면 만날래요? 곰장어 좋아해요? 먹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 첫 만남에. 뭐, 어때요. 전 그런 게 좋아요. 가림막 없는 인사. 송파로 오실래요? 잠실에서 봐요. 좋습니다. 몇 시 퇴근해요?

신기루를 만났다. 높이 뜨는가 싶더니 곧 사라진다. 항상 새롭고 또 익숙하다. 반갑습니다. 어디 살아요? 상도동이요. 아, 숭실대 근처죠? 아뇨. 제 집은 산과 가까워요.

아침

잠이 안 올 때 먹어라. 하나에 열두 시간이다. 중간에 깨면 일어나기도 전에 괴로울 수 있다. 반으로 쪼개면 시간은 삼분의 이로 줄어든다. 어떻게 채우든 부족하든 사실 상관없다. 나약함을 경험하기엔 좋을 것이다. 일과를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충고 같은 건 무시하라. 전철이 느린 것처럼 보여도 네 걸음보다 빠르고 택시가 아무리 춤을 춰도 네 아침보다 느리다.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어도 시간은 네 편이다. 느리게 살아라. 반 알을 먹더라도 마음은 숭고하여라. 길게 생각하고 짧게 살아라. 어차피 삶의 속도는 네 것이 아니다. 느긋하게 실패하라. 마음에 들 때까지 실패하면 마침내 잠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