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희준의 렌즈

카메라 렌즈가 깨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조신하게 보내자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또 흥을 이기지 못했다. 술이 문제일까. 아니다. 오늘은 별로 마시지도 않았다. 골뱅이무침에 골뱅이가 얼마 없다고 화를 낸 기억도 난다. 버스가 도착할 때 카드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질 때도 몸을 흔들지 않고 똑바로 서 있었던 나다. 그럼 이 가파른 언덕 때문일까. 집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은 오르내려야 하는 언덕 때문에 가끔 정신이 멍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힘든 건 오르막이고 내려갈 땐 또 괜찮았는데. 내려갈 때. 내리막에서 조금 폴짝대기는 했다. 그런데 그건 오를 때 숨차고 힘든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보는 사람도 없는 밤인데 뭐, 그럴 수 있잖은가. 선물로 받은 물건은 망가지고 깨지는 게 내 운명인가 싶지만, 이 렌즈는 왠지 마음이 아프다. 오래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마저 나를 떠나다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우리 집 대문이고, 그럼 곧 내 방이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그럼 카메라도 쉴 수 있었는데 나는 뭐가 그리 급했을까. 이런 날 종로까지 카메라를 메고 갈 생각을 했다는 게 잘못이었을까. 사진을 마구 남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을까. 렌즈를 선물로 받은 게 문제였을까. 그럼 이 선물을 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르겠다. 사람까지 생각이 미치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희준이 준 렌즈, 함께 메던 카메라, 한 정류장 지날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찍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라고 마지막 날이 있는 건 아닐 텐데. 조신하게 보내지 않으면 분명 또 후회한다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이놈의 흥이 문제다. 술이 문제일까. 아니다. 오늘은 별로 마신 기억도 없으니까. 골뱅이무침에 있는 소면을 혼자 다 먹겠다고 그릇에 덜어가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이 렌즈는 왜 깨진 걸까. 왜 하필 마지막 날이었을까.

밥을 먹다가

꼬리곰탕은 꼬리로 만든 거겠죠? 아마도요. 목살은 목 부위니까. 저는 ‘꼬리’라는 단어를 보면 다른 동물이 연상돼서 잘 못 먹겠어요. 무슨 동물이요? 그냥, 소 말고 다른 거요. 미진씨는 괜찮아요?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어쨌든 고기잖아요. 그럼 혹시 뱀 같은 것도 드시는? 뱀은 조금 징그럽지만, 막상 눈 앞에 있으면 먹을 것도 같아요. 제가 워낙 먹성이 좋아서요. 누가 요리해주는 것도 곧잘 드시고 그래요? 맛에 민감하다거나 유독 맛집을 찾아 다니신다거나. 아유, 웬걸요. 제가 가는 곳이 곧 맛집입니다. 아무거나 줘도 다 잘 먹는다는 게 저의 몇 없는 장점 중 하나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상당히 날씬해 보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보시다시피 살이 좀 붙어 있잖아요. 그런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음식을 많이 가립니다. 우선 파를 먹지 않고요, 익힌 당근이라던가 생 오이라던가, 이런 걸 먹으면 속이 거북해져요. 그거 왜인지 아세요? 다 어릴 때 교육 때문이래요. 다들 그 얘기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집, 꽤 엄했는데. 밥 먹을 땐 아니었나 보죠.

달덩이

“너는 이상형이 뭐야?”
“재미있는 사람.”
“끝?”
“재미있고 웃긴 사람. 그리고 자기 삶이 있는 사람.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도 좋아.”
“자기 삶이 어떤 거지. 외모적으로는?”
“동글동글한 사람.”
“동글동글?”
“응. 얼굴이나 뭐 등등. 근데 사실 외모는 별생각 없어.”
“그런 사람이 왜 좋아?”
“동글동글한 사람은 왠지 마음도 동글동글할 것 같거든.”
“달덩이 같은 사람은?”
“아, 너무 좋아.”
“나는 어떤 것 같아?”
“뭐가?”
“이상형으로서.”
“생각 안 해봤는데. 네 이상형은 뭐야?”
“너.”
“뭐?”
“너라고. 이상형.”
“취했구나.”
“나 안경 낀 사람 좋아하거든.”
“세상 사람 절반이 안경 끼고 다니지 않나.”
“그럼 그냥 너로 하자.”

커피집

운동화, 구두, 운동화, 운동화, 구두, 부츠, 운동화, 구두, 구두, 운동화, 슬리퍼, 구두, 쪼리, 슬리퍼, 운동화, 운동화, 10분째 창밖을 보고 있다, 사람이 끊이지 않고 지나간다, 민소매, 긴소매, 민소매, 민, 민, 긴, 민, 남방, 민, 점퍼, 민, 민, 여름이 코앞인데 점퍼를 입는 사람이 있네, 민, 긴, 긴, 후드, 후드집업, 집업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에어컨 바람을 10분쯤 맞으면 팔 가죽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프므로, 운동화, 운동화, 슬리퍼, 나도 운동화를 신었으니 운동화 그룹에 포함해야 할까, 관찰자는 빼도 되지 않을까, 구두, 구두, 운동화, 구두, 커피집에서 주스 시키는 사람들 이해 안 가요, 왜요, 커피가 몸에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주스집에 가야지 왜 여기에 온대요, 그야 커피집 분위기가 더 좋으니까요, 저도 가끔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찝찝해질 때가 있어요, 그 사람이 구두를 신는 걸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 나는 마지막으로 언제 구두를 신었을까, 민소매, 민, 민, 긴, 남방, 민, 점퍼, 민, 민, 후드, 후드집업, 아까와 순서가 비슷한 것도 같다, 사람들이 빙빙 돌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