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고구마 케이크

진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랜만에 고구마 케이크나 먹으러 가자면서. 진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학교 때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우리 그때 빵집 자주 갔잖아. 너 맨날 고구마 케이크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고 그랬는데. 기억 안 나?’ 하고 물으면서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사실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대로 이야기하면 어쩐지 미안할 것 같아서 나 그런 거 안 먹은 지 오래됐어, 하고 답했는데 그러면서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때문인지 그 옛날 야간 자율학습의 추억 때문인지, 혹은 김진수라는 흔하디흔한 이름 때문인지 모르겠다. 진수는 그래서 언제가 괜찮겠냐고, 말 나온 김에 약속이나 잡자면서 ‘나 예전의 김진수 아니다. 제법 세련되어졌어.’ 하는데 나는 또 왠지 그의 그런 말이 싫었다. 내가 알던 그는 촌에서 막 올라온 순둥이였는데, 내가 기억하는 김진수는 빵 먹으면 목말라 힘들다면서 늘 나의 식성에 반대하던 아이였는데, 세월이 사람을 바꾸어 놓은 건지 혹은 그에 대한 내 기억이 왜곡된 탓인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화 덕분에 잊고 있었던 그의 얼굴도 조금씩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왜 갑자기 전화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왜 하필 고구마 이야기를 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이 없어도 누군가 몇 번이고 말해주면, 그리고 설득시켜주면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모습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가도 싶다.

나는 누구입니까

며칠 전 어느 골목을 지나다가 바닥에 놓인 수첩을 봤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모양이었다. 혹시 찾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근처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뿐이었다. 어딘가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첩 첫 장을 열어 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다른 장도 마찬가지였다. 수첩을 빠르게 넘겨 봤지만, 내용이 적힌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수첩은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니셜로 보이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사람 이름인지는 몰라도 이게 주인을 찾는 단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 경찰관에게 수첩을 보여줬다. 누군가 떨어뜨린 것 같다고, 주인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그의 손에 수첩을 쥐여줬다. 경찰은 수첩을 앞뒤로 살펴보고 넘겨도 보더니 알겠다고, 맡기고 가시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파출소를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지나온 골목으로 돌아가다가 다시 바닥에 놓인 수첩을 봤다. 아까와 같은 모양인데 겉표지 색이 달랐다. 수첩의 맨 뒤 장에는 아까 본 것과 동일한 이니셜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서점에 가서 펜을 샀다. 수첩을 잃어버린 주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뒤에 나는 다시 파출소를 찾았다. 아까 수첩을 맡아주신 경찰관 계신가요, 하고 물었는데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의아해서 파출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정말 아까 본 얼굴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파출소를 나와 수첩을 처음 발견했던 골목으로 돌아갔다. 경찰관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수첩을 펴고 뭔가를 읽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가 읽던 것은 내가 새로 주운 수첩에 적은 편지였다. 경찰관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순간 그 수첩의 주인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목적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무서운 기분이 든다. 이 무서움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동안 사라졌다가 집을 나설 때 다시 생겨난다. 기대하지 않은 것들이 내게 다가오고 예측하기 힘든 공간으로 몸이 당겨지는 그 느낌이 매번 낯설다. 매일 어디론가 가서 무언가를 하지만 나는 그게 어디인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있다가 일을 놓치기도 한다. 목적지 없이 움직이는 하루도 사회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 하루의 목적을 알고 싶다. 회사에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내 말을 들을 수 있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어도 나와 함께 걷고 일하며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아도 나를 보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매번 고마움을 느끼지만 표현할 말을 몰라서 웃어주기만 한다. 그러면 그들도 같이 웃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 넌 아무 이상 없다고, 누구나 그런 것이니 금방 또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어떤 기분인지 자신도 잘 안다고,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덧붙인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 세상에 남아있는 한 서로 피해만 줄 뿐이다. 내 하루의 목적은 이런 것인가 싶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무서운 기분을 느끼고, 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회사에 가서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잠시 고마움을 느끼고, 그 표현을 위해 웃어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증오를 느끼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라지는 게 낫겠다, 생각하면서 그들과 나를 세상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찾는 것 말이다. 언젠가 생각을 비울 수 있다면 나도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사라져야 한다. 그게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군산으로 가는 길

1.
“그래서 그 비밀이란 게 뭔데?”
“작년에 우리 여행 갔을 때 있잖아.”
“런던? 아니면 부산?”
“아니, 여름에 짧게 갔을 때. 주말에 말이야.”
“그 섬 많은 데 말하는 거야? 군산이었나.”
“응. 고군산군도.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나 석양 보다가 울었잖아.”
“맞아. 그때 사실 내가 일이 하나 있었거든.”
“아, 너 표정 안 좋았을 때 얘기하는 거구나. 맞지? 내가 너 무슨 일 있냐고 계속 묻고 그랬잖아. 너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고.”
“응. 그때 잠깐 만날까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랑 같이? 거기에서?”
“아니, 나 혼자.”
“일 때문에? 그런데 왜 얘기 안 했어?”
“안 만나기로 했거든. 또 굳이 말할 필요까진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그럼 그때 전화 온 것도 그 사람이었어?”
“전화?”
“응. 계속 걸려 오고 그랬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부재중 다 떴는데.”
“그건 모르겠는데. 나 부재중 기록 안 보는 거 알잖아.”

2.
“그래서 뭐가 비밀인 거야?”
“나 이사하기로 했어.”
“갑자기? 어디로?”
“군산. 우리 회사 지점이 새로 생겼는데,”
“무슨 소리야. 갑자기 군산을 왜 가?”
“들어 봐. 회사에 오래 있었던 직원이 몇 명 필요하대서 고민하다가,”
“그게 언제부터 있었던 얘긴데?”
“그때 군산 갈 때쯤.”
“그걸 이제껏 혼자 생각하다가 결정한 거야?”
“미진아.”
“너 뭐야? 나보고는 고민 있으면 다 말하라며.”
“미안해. 같이 고민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야. 나하고 같이 고민할까 말까를 생각했다고? 군산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응.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너 좀 웃긴다. 그래서 언제 가는데?”
“이번 주말. 토요일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알지?”
“응. 이제 이틀 남았지.”

3.
“당황스럽다. 이걸 언제 얘기하려고 지금껏 말도 없이 있었던 거야?”
“원래는 지난주에 말하려고 했는데,”
“지난주? 이번 토요일에 무려 군산으로 이사한다는 걸 지난주에 말하려고 했다고?”
“미안해.”
“넌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그래서 왔잖아.”
“그럼 뭐, 같이 가기라도 하려고?”
“안 되겠지?”
“너 지금 장난하니?”
“역시 괜히 말한 것 같다. 그냥 조용히 갈걸.”
“조용히 가면 뭐, 그냥 사라지려고 했어?”
“가서 연락하려고 했지.”
“대단하다 정말. 너는 모든 게 쉽구나.”
“미진아.”
“이름 그만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