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번 따로 뵙고 싶었어요.”
“잘했습니다.”
“주말마다 오시는 거예요?”
“네. 쉬는 날마다, 별일 없으면요.”
“이렇게 보니까 어때요?”
“반가워요. 신기하기도 하고.”
“신기하다고요, 어떤 게요?”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까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름 불러요. ○○님. 아니면 저기요.”
“아, 네. 저기요. 이렇게 부르면 되나요?”
“네. 저기요님.”
Category: 1994
저기요
마이클 크라이튼
빈 종이에 이름을 백 번 적으면 꿈에 그 사람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름과 소설 제목을 공책에 수없이 적었고, 다음 날 아침 울면서 잠을 깼다.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백 번 소리 내어 부르면 마음이 편해진다길래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음악을 듣다가도, 공부하거나 책을 보다가도,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아마 불렀다기보다 입에서 그냥 나왔을 테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는 했다. 그리고 다시 외국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와 더글라스 케네디가 내 정체된 욕망을 살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크라이튼이 세상을 떠나고 이삼 년쯤 지난 뒤였다. 언젠가 마음에서 집착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그의 마지막 소설을 꺼내어 읽었다. 미출간으로 남아있던 걸 누군가 발견한 덕분이라 했다.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나서 악수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사라져서 아쉽고, 슬프고 그랬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많이 울었는데, 그래서 한동안 외국 작가의 책도 안 봤는데, 그런 시기를 지나 이렇게 또 잘 살고 있으니 어쨌든 삶은 계속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쥬라기 공원과 잃어버린 세계였다. ‘인젠’ 때문에 유전공학자를 꿈꿨다가 네드리와 아비를 보면서 프로그래머와 해커를 동경했고, 레빈과 그랜트, 하딩 때문에 동물학자와 고고학자가 되는 상상을 했다가 말콤을 보면서 수학자를 동경했다. 닥터 손 때문에 언젠가 포드 익스플로러를 타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의 대사 몇 마디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도 했다. 소설 중간 트레일러에서 하딩이 켈리에게 하는 조언과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손의 독백은 아직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지표로 남아 있다. 그 덕분에 콩고를 알게 됐고, ERTS와 델로스를 알면서 데이터베이스와 인공지능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내가 컴퓨터 앞에서 떠올리는 모든 그림은 그의 소설에 이미 등장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를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 모든 욕망의 출발점이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중 하나는 이루었다. 이름 뿐이긴 하지만 결국 전공 중 하나로 고고학을 남겼으니까. 그래서 말이지만 크라이튼, 고마웠습니다. 리처드 레빈, 하딩, 손, 아비, 그랜트, 말콤, 네드리, 헨리와 다프네, 모두 고맙고요. 이슬라 소르나, 이슬라 누블라, 어딘가 잘 있겠지요. 사이트 B,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알파벳도 B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내 삶은 당신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C Major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같이 들어보고 싶었어요. 1이라는 숫자는 특별하잖아요. 첫 감정, 첫 선물, 처음이라는 의미로서요. 저는 폴 루이스와 BBC 교향악단이 연주한 버전을 좋아해요. 들어 볼래요?
두끼 떡볶이집에 둘이 가서 야채를 두 번 담고 만두도 두 번 담아왔다. 같이 명동에 간 두 번째 날이었다. 오후 두 시쯤 배가 불러왔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나는 이날 그를 두 번 만났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다시 한번. 쿠키 영상 같은 하루였다.
명동은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와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가 각각 회차하는 곳이다. 한 버스에서 다른 버스의 번호를 뺀 숫자는 2로 시작해서 2로 끝나는데 그 중간에 0이 있다. 열심히 껴 맞추다가, 두 가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낮에 뜨는 달
“이거 꼭 그거 같아요. 주사 맞으면 문지르라고 솜 주는 거, 아니면 화장 솜? 두부인가 싶기도 한데 설마 그건 아니겠고.”
“마시멜로 같은데요.”
“달 참 예쁘다.”
“그렇죠? 낮에 뜨는 달 너무 좋아요. 이 시기부터 여름이 좋은 유일한 이유랍니다.”
“저 여름 진짜 좋아해요.”
“정말요? 이유를 여쭤도 되나요?”
“모든 게 살아있는 것 같아서요.”
“사실 아직 편하시죠? 외로움보다는.”
“저는 사람을 좋아해요.”
“저 궁금한 부분이 있어요. 날씨에 감정 변화가 없기로는 지금껏 만난 사람 중 최고였는데, 이것은 나를 대할 때도 비슷했다. 처음 보는 지인마다 ‘미진 씨 좋아하는 거 맞죠?’라고 물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유독 변화가 없었다. 여기에서요, 미진이랑 사귀고 있는데 다른 남자한테 ‘너 얘 좋아하지?’라고 물었다는 걸까요?”
“미진이 이 남자를 데리고 지인을 만났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미진을 보고 ‘저 남자 너 좋아하는 거 맞지?’라고 했던 거였어요.”
“아하, 그런 거군요. 위태로운 남자인걸. 그럼 날씨와 감정 변화는요?”
“허술한 서사를 찾아내셨어요. 웬만해선 표정 변화도 없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뭐는 아침에 쓰고 뭐는 오후에 쓰고, 그렇게 짜깁기를 하던 중 나온 폐해입니다.”
“글 쓰면서 생각 많이 하시는구나 싶어 신기해요. 각각 다른 데서 영감받으시는 거예요?”
“대개는 되어보고 싶은 사람 되어보기, 하는 것 같아요. 남자 입장, 여자 입장 되어보기, 혹은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 그려보기 같은.”
“오, 통화 괜찮으세요?”
“좋아요. 5분만 이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