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1994

알면서 그래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별로야. 또 낭비했구나, 생각만 드는 거지. 어제의 나는 오늘을 기대했겠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를 비웃는다. 알면서 그래. 가끔은 술술 나올 때도 있어. 생각에 골몰하지 않아도 문장이 알아서 글을 쓴다. 그리고 그럴 땐 차라리 복권을 살까 싶어. 실수는 나의 힘이고 그래서 했던 실수를 또 하면서 차라리 자랑스러워하자, 위로해주자, 하는데 신기한 건 그 와중에 시계는 꼭 고쳐 감는다는 거야. 사람은 변하지 않아.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나지만, 오늘의 나는 영락없는 어제의 그 사람이지.

평일 원고 마감은 아침 여덟 시, 가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글을 보낸다. 그래도 건너뛰는 것보다 낫지 않냐며 위로 아닌 위로를 보낸다. 문장은 곧 새로운 여행이 되어 나를 찾아온다. 오늘도 나는 용감한 젊은이로 살아가자.

청솔공인중개사

석촌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솔공인중개사라는 이름의 부동산 사무실이 있었다. 두 중개사가 동업하듯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인터넷에서 ‘저렴한 가격의 투룸’을 검색하던 중 그곳을 알게 되었다. 2012년 여름의 일이었다.

처음 사무실을 찾았을 때 나는 들뜬 상태였다. 퇴근하고 난 뒤의 늦은 시각이어서 나는 ‘죄송합니다. 괜찮을까요?’라고 물었고 중개사는 ‘그럼요. 원래 문 닫을 시간인데 손님이 계시면 언제든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시종일관 웃으며 내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해주었다. 한 시간가량을 다니면서 여러 집을 방문했는데 아직 집이나 가격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어떤 집을 보아도 아늑하고 좋아 보였다. 얼마 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첫 계약서를 작성했고, 두 중개사는 손뼉을 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큰 행복 중 위에서 두 번째의 것이었다.

2년이 지나고 나는 두 번째로 사무실을 찾았다. 다른 지역을 가볼까 싶어 강동구의 한 중개사를 통해 암사동 근처를 둘러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다시 찾은 사무실은 반갑고 편안했다. 중개사는 그동안 집값이 많이 올라서 내가 원하는 집을 이 동네에서 찾기는 힘들 거라며 옆 동네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네. 그래도 호수에 걸어서 갈 정도의 거리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2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은 집을 둘러보고 난 뒤에 나는 그 사무실에서 두 번째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그때의 경험은 아마 살아오면서 받은 것 중 단기간에 가장 많은 집을 둘러본 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두 중개사는 이번에도 웃으며 기뻐해 주었고 나는 2년 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족했다. 새로 얻은 집은 모든 창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햇살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그로부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화로 먼저 사정을 말했을 때 중개사는 답을 하지 못했다. 집을 못 구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무실을 다시 찾게 된 이야기에 대해 딱히 해줄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원하는 집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려고 하자 중개사는 ‘주차공간, 남향, 확장 안 됨, 호수랑 가까운 곳, 맞죠?’라고 하면서 웃었다. 동네를 둘러보면서도 중개사는 편한 선배나 가까운 친척 같은 느낌을 풍겼는데, 한 번씩 ‘이 정도 거리면 괜찮죠? ○○씨 석촌호수 좋아하잖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치 서로 자주 왕래하는 사이인 듯 정성을 다해 집을 골랐고, 얼마 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세 번째 계약서를 작성했다. 중개사가 내민 청구서에는 수수료 위로 굵은 두 줄과 함께 금액이 새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원래 내야 하는 수수료의 절반보다 적은 액수였다. 그래서 나는 ‘이거 맞는 거예요? 금액이 다른데.’라고 물었고, 중개사는 잠시 청구서를 확인하더니 ‘이번에는 다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서 그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었다.

3년 전 마지막 이사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찾은 사무실 자리는 간판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사무실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두 중개사가 잠시 쉬기로 했다는 것인데,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부동산 사무실을 방문하기로는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2년 전 휴대폰의 연락처를 모두 지우는 과정에서 중개사의 번호도 사라지고 말았다. 여느 주말처럼 종로를 가기 위해 서울역을 지나다가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던 곳이 오늘은 조금 한산하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지금껏 가장 큰 행복은 뭐였을까’에 대해 생각하는데, 조금 걷다 보니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내가 떠올리는 만큼 그들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슬퍼도 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좋은 집을 선물해준 두 중개사에게 이 글을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그럴싸한 시간

한동안 평일 점심으로 아몬드를 먹은 적이 있다. 여러 견과류가 담긴 통을 사다가 조금씩 덜어 먹은 게 시작이었는데,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아몬드를 먹을 때의 느낌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입안에 담기는 고소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아몬드에서 자연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생각도 했는데 풀이 뭉뚝하고 단단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인가 싶기도 했다. 한때 견과를 밥처럼 먹었지, 라고 생각하다가 오래전 산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 단단한 풀 때문인가 싶다.

3년 전 어느 겨울엔가, 산을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은 바라볼 때만 좋아서 여행도 바닷가로만 다녔는데 그때는 조금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로 아울렛을 찾았고, 두 번의 주말을 보내는 동안 배낭과 재킷, 티셔츠, 바지, 등산화 같은 것들을 사들였다. 인터넷으로도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했는데 그중에는 아이젠도 있었다. 언젠가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배낭과 물품을 정리하다가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다음 주말이 왔을 때 나는 드디어 산에 오르게 되었다. 늦은 겨울, 서울 남쪽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청계산이었다.

가끔 옷장 서랍에서 투명 비닐에 싸인 손수건을 본다. 포장 그대로 남아있는 그 수건은 오래전 산에 갈 준비를 한다며 샀던 많은 물건 중 하나다. 마음에 드는 무늬를 찾겠다고 꽤 오랜 시간 돌아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겨울이지만 곧 여름이 오면 땀이 많이 날 테니까, 그래서 준비해둔 것인데 그해 여름, 나는 산을 오르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청계산은 지금까지 내 의지로 오른 처음이자 마지막 산이 되었다. 가끔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보면 ‘저도 청계산 가본 적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경험을 묻고 탐하고, 조용히 공감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봄이 한창일 때 한라산을 오르면 걷는 내내 유채꽃도 보고 좋을 텐데, 아이젠 없이도 신기하고 재미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한라산에 유채꽃이 얼마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제주에 널리 퍼진 유채꽃만큼 내 주변 많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좋은 경험을 나누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도 모레도 맑은 웃음이 함께 하기를, 가끔은 그 한구석에 나에 대한 기억도 자리하기를 희망한다.

마음 안에서

가끔 기분이 정말 좋아지는 음악을 발견할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럴 때 뭐라도 쓰고 싶어져요. 누구에게든 얘기하고 싶거든요. 나 이렇게 기분이 좋다고, 같이 느끼자고요. 그런데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항상 정리가 되지 않아요. 감정으로 시작해서 감정으로 끝나는데 그게 딱, 지금 같거든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본인도 모르는 거죠.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이 감정을 나눠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심지어 내 감정을 궁금해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표현은 종종 안 하느니만 못한 것 같아요. 나만 알고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은 하잖아요. 물론 이야기가 생산되는 순간에 마음을 다잡는 건 힘든 일이긴 해요. 어디든, 누구에게든 어서 이 멋진 생각을 퍼뜨리고 싶으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평온을 찾아야 해요. 힘들 땐 심호흡이라도 하면서요. 마음은 마음 안에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법이잖아요. 혹여나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어딘가 흘렸다면 빨리 잊도록 해요. 어차피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건 일분 남짓이에요.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금방 잊는 것처럼요. 그러니 너무 상심하진 말아요. 잠시 감정에 솔직했던 거라 생각하자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음악이 모두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요. 언젠가 우리도 성숙해지는 날이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