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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가끔 달력을 보다가 방황을 한다. 오늘을 찾기 위해 어제, 그제의 기억을 살리는데 지난 주말까지 떠올려야 할 때도 있다. 날짜를 모르고 산지 오래되었다. 회사를 다녀야 하니 월요일은 기억하지만 나머지는 금세 잊고 만다. 금요일은 쉬고 싶을 때쯤 찾아온다. 종종 하루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을 한다. 할 일을 자주 잊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시간은 나와 다른 속도로 사는 것 같다.

눈앞이 흐리면 안경 탓을 한다. 렌즈를 닦으면서 어쩌다 안경이 나와 하나가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있다. 눈앞이 흐린 이유가 렌즈에 남은 추상화 때문이라는 걸 알면 나는 안경을 바꾼다. 왜 그렇게 일찍 안경을 주었냐고, 왜 내 몸과 하나가 되게 두었냐고 원망한 적이 많다. 하지만 안경에게는 죄가 없었다. 나는 가끔 렌즈 뒤에 숨는다.

월요일 아침마다 마음이 묻는다. 네 욕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열심히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다.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하루쯤 욕심을 놓으면 금요일이 온다. 안경을 벗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희미할 때 나는 투명 인간이 된다. 해가 기울고 기분이 좋아지면 머리가 대답한다. 모릅니다. 나는 욕심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트윈스

어릴 때 아빠가 야구 좋아하냐며 회원가입을 시켜준 일이 있었다. 언젠가 큰 상자가 도착했고, 그 안에는 어린이 회원이라며 가방부터 시작해 회원카드, 스티커, 사인볼, 모자, 티셔츠, 재킷, 신발 등이 들어있었다. 아빠는 야구단 책자를 펼치고 내게 트윈스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는데 아직 기억나는 건 1990년 우승과 홈런왕 이광은이다. 한동안 나는 야구단 책자를 마르고 닳도록 뒤적이며 선수 이름을 외웠다. 책자 여기저기엔 트윈스 로고와 함께 방망이를 든 쌍둥이 로봇이 등장했는데 대문자 L의 생김새가 유난히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성씨의 첫 알파벳과도 같아서 공책에 수없이 그리며 연습한 적도 있다. 그해 사진첩 곳곳에서 나는 트윈스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데, 아빠 차를 타고 어딘가 갈 때면 항상 사인볼을 들고 다닌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윈스에 어린이 회원 제도가 막 생긴 때였던 것 같다.

몇 년 뒤 우리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빠는 회사를 나와 대리점을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친구들과 이별을 했다. 아빠의 대리점은 너무 멀리 있어서 이제 아빠를 볼 수 있는 건 주말뿐이었다. 그래서 일 년 뒤 우리는 다시 이사를 했고, 나는 친구들과 두 번째 이별을 했다. 그래도 가끔 대리점에 놀러 가면 사람들이 아빠를 ‘사장님’ 하고 부르는 게 듣기 좋았다. 아빠는 이제 사장님이었고 대리점 창고에는 내 책상도 있었다. 얼마 뒤 아빠가 다녔던 회사의 이름이 바뀌면서 대리점도 간판을 새로 달았는데, 한때 회원이었던 야구단 이름과 같았다. 야생마 이상훈이 마운드에서 갈기머리를 휘날리던 때다. 야구는 이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가끔 티브이에서 이상훈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학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아이가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응원하던 팀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아이를 통해 ‘엘롯기’를 알았다. 꼴찌를 다투는 삼인방이라며 엘지, 롯데, 기아의 줄임말이란다. 별명이 꼴지, 꼴데, 꼴아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나도 어릴 때 트윈스 팬이었어, 너처럼 매일 야구모자 쓰고 다니고 그랬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야구도 보곤 했다. 내가 다니던 과는 고고학과 미술사학을 함께 다루는 곳이었는데 그 아이는 고고학에 뼈를 묻고 싶어 했고, 나는 다음 전공을 알아보고 있었다. 몇 년 뒤 SNS를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 목록을 보다가 발견한 그 아이는 여전히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가 야구 경기를 하길래 잠시 멈춰봤다. 트윈스가 자이언츠를 2:1로 이기고 있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그대로 틀어두고 오며 가며 보는데 점수가 변하지 않는다. 결과가 궁금해서 음료를 따라다가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를 보면서 레드삭스를 향한 주인공 벤의 순수한 사랑이 멋지단 생각을 했다. 펜웨이파크에 벤을 처음 데려가 야구를 알려주고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준 삼촌, 그런 순수한 어른이 내 주변에도 있었으면 했다. 오랜만에 그 기억을 떠올리다가 어릴 때 생각이 났다. 9회 초 자이언츠가 2아웃에서 만루를 만들었고, 트윈스가 1루 땅볼로 마지막 아웃을 잡으며 승리를 챙겼다. 다들 하나쯤은 있다는 ‘응원하는 팀’을 나도 갖고 싶어서 이 팀 저 팀 비교하던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난 이미 ‘응원해온 팀’이 있었다. 영화에서 야구단 책자를 펼치고 레드삭스의 위대함을 설명하던 벤의 삼촌이 내겐 아빠였던 것 같다.

볼프강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건 음악 소리 키우기입니다. 자는 동안 틀어둔 게 아직 마음에 들면 그냥 두고, 아니면 다른 음악을 골라요. 주로 듣는 건 피아노 협주곡인데 가끔 펑크, 메탈 같은 락을 틀어두기도 합니다. 기분이 유난히 좋다거나 들뜨고 싶을 때요. 보통 때면 일어나 샤워부터 하러 가겠지만 오늘은 침대에 누운 채로 시간을 보냅니다. 공상도 하고 밤새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잠이 와서 어느새 다시 눈을 뜨는데, 그럼 또 음악을 골라요. 제 기분에 장단을 맞춰주는 게 이 아이폰의 역할입니다. 아침 시간을 갖고부터 주말이 길어졌어요. 이렇게 누운 채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뒹굴다가 잠들고 깨고, 해도 아직 낮이 오려면 멀었습니다. 어제 비와 바람이 우렁차 보여 외출을 미뤘는데 오늘도 아직 창밖은 흐립니다. 그래도 예보는 오후에 해가 뜬다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요. 여기는 게으름과 느긋함 사이 어딘가입니다.

안녕, 새로움

연락처를 지운 게 시작이었다. 메신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게 불편했다.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위에서부터 하나씩 지우다가 내가 먼저 인사할 일 없겠지 싶어 뭉텅뭉텅 지웠다. 중간에 아차 했던 사람도 있다. 열 명쯤 남기고 보니 이제 메신저는 껍데기다. 그래서 계정을 지웠다. 얼마 뒤 SNS도 껍데기 같단 생각을 했다. 친구 목록을 지우면서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아무도 연결되지 않은 공간을 보니 그야말로 껍데기의 껍데기다. 그래서 SNS를 탈퇴했다. 이 정도면 잘 숨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의 공간을 보고 감정을 읽으며 내 하루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게 나를 해친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을 막을 방법이 없어 그들을 볼 수 없게 했다. 정보는 공평해야 하니 나도 사라진다. 이십 년 만에 편지를 썼다. 의지하고 싶은 곳이 없었다. 말로는 이해한다지만 우린 다르잖아? 편지를 독백으로 바꾼다. 사라질 용기가 있으면 성공하고도 남는다며, 오래전 누가 그랬다. 운다고 알아주진 않아. 까만 하늘을 한참 보다가 사무실로 내려갔다. 일이 목덜미를 잡아야 생각도 멈추는 법이다. 야근이 고마웠다.

일 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회사는 백지의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회의가 많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일이라 치고 게임을 하기도, 게임을 일처럼 하기도 한다. 일도 사람과 같아서 새 프로젝트는 설레면서 두렵다. 어쩌다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진 나를 본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을 줄여본다. 먼저 말을 거는 연습도 해본다.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욕심도 부려본다. 책 읽는 시간을 쪼개어 남겨둘 것과 버릴 것, 바꿀 것을 고른다. 생각했던 일을 하나씩 해보면서 마음에 드는 지점을 찾는다. 과거, 미래, 뭐 이제 현재도 좋다. 여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움은 언제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