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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지, 일은 어떻게 할지, 어떤 경력을 쌓을지, 누굴 만날지, 언제까지 생각만 할 거야? 결정도 해야지.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방향도 틀고. ○○님도 예전엔 그렇게 했을 거야. 이런저런 일 겪고, 생각이 많아져서 그렇지. 움츠러들 필요 없어. 왜? 우리가 죄지은 거 아니잖아. 난 이제 삼십 년 남았어. 금방 가. 낭비할 시간이 없어. ○○님도,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마.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님이 결정해서 생긴 일이잖아. 그렇지? 인생도 그렇게 하는 거야. 고민 충분히 많이 했어. 이제 결정해.”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게 될 거라면 그게 꼭 나중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언젠가 하게 될 말이면 지금 해도 되지 않을까. 마크 트웨인이 그런다. 이십 년 뒤에 우리가 후회하는 건, 했던 일이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이라고.

태양소년

집 앞 공터에서 누가 영상을 만든다. 밤하늘 여기저기 달과 지구와 별들을 놓고 특수효과로 마무리한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하늘을 찍는다. 조금 있다 만나면 보여줘야지 싶다. 밤공기가 좋다 생각하는데 어르신이 흰옷을 입고 지나간다. 머리를 까맣게 염색해서 못 알아볼 뻔했다. 웃는 모습이 여전하다. 넌 새해 인사도 없냐며 서운해하시길래 달려가 팔짱을 꼈다. 대문까지 따라가 인사하고 나니 같은 건물 일 층이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부지런히 걷는다. 몇 년 만에 낀 반지가 어색하다. 영상을 보여주고 어르신 만난 이야기도 해야겠다.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하다.

잠에서 깨는데 어릴 때 본 만화가 생각난다. 결국 만났을까 모르겠다. 역시 마지막 기억이 없다. 노래가 자꾸 맴돌아서 찾아 들었다. 모험의 날개를 활짝 펴라, 태양소년 에스테반. 젊은이 사전을 펼쳐봐라.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다음에

요즘 아홉 시가 넘으면 잠에 드는데 꿈을 자주 꿔요. 한 꿈이 끝나면 깼다가 다시 잠들고, 하기를 두세 번 반복하면 아침이 옵니다. 실컷 자고 일어나도 해가 뜨기 전이니 창밖은 아직 까매요. 이틀 전 가까운 분의 상을 치르는 꿈을 꿨어요. 잠에서 깨고 연락해봐야지, 하다가 쑥스러워 말았는데 오늘 꿈에서 같은 분의 상을 또 치렀어요. 연결된 이야기는 아니고 그땐 그 꿈에서, 이번엔 이 꿈에서 각각 돌아가신 겁니다. 이틀 전 꿈에선 서럽게 울었는데 이번엔 덤덤해요. 해몽을 찾아보니 그분이 장수할 꿈이라고, 제게도 좋은 꿈이라는데 찝찝함이 사라지진 않아요. 명절이 지난 지도 얼마 안 됐으니 다음 달에나 연락해봐야겠어요.

일찍 잠든 지는 세 달쯤 됐어요. 처음엔 어떤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해가 지면 졸리기 시작해서 그냥 잠드는가 봐요. 음악은, 잠자는 동안에도 내내 틀어둬요. 작년 가을부터 자장가로 제일 많이 들은 건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입니다. 마음이 동요할 때 듣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장가가 됐어요. 아침에 딱히 뭘 하진 않아요. 책을 볼 때도 있는데 주로 누운 채로 공상을 합니다. 언젠가 하고픈 게 생기면 이야기해줄게요.

취미

입고 싶은 옷이 많았던 때가 있다. 언젠가 옷을 자주 사면서는, 기분 따라 고를 수 있게 미리 준비한단 생각도 했다. 가끔 옷장을 정리하다가 마지막 입은 게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는 옷을 본다. 그냥 두자니 이번에도 입지 않을 게 뻔하고 버리자니 추억이 아깝다. 채우는 건 금방인데 비우기는 어렵다.

지하철을 타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창밖이 까맣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자리에 앉으면 여러 사람을 마주 본다는 게 두 번째였는데 요즘은 곧잘 탄다. 쉬는 날마다 종로를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자리에 앉는 대신 선 채로 창에 비친 사람들을 보는 게 재미있다.

규칙적인 여가를 보낸 지 반년쯤 됐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료를 마신다. 책을 보는 시간도, 걷고 이동하는 시간도 거의 같다. 매번 비슷한 음악을 들으니 조급함도 쉬이 물러난다. 취미는 쉽게 오고 쉽게 사라진다. 사람도 그렇다. 미움 많은 세상,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