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 첫 장에 나오는 문단인데, 얼마 전 퇴근하고 쌀을 씻다가 생각났습니다. 팔 년쯤 전 아주 좋아했던 소설이거든요. 다른 삶, 더 재미있는 삶이 있을 것 같아서 직업을 바꾸고 싶단 생각을 종종 합니다. 막상 가까이 가보면 생각했던 것과 다를 텐데 말이죠. 저거 괜찮아 보이는데, 이거보다 재미있겠는데 하는 것들,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한 부분인데 멀리서 구경하는 자에겐 호기심이 되나 봅니다. 내 삶과 직업을 ‘저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람도 어딘가 있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욕심인지 열정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원래 하던 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그게 허상인지 그럴싸한 계획인지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이 다 되길 기다립니다. 마침 TV에선 영화 ‘본 슈프리머시’가 나옵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많은 신분을 가진 제이슨 본은 어떤 기분으로 살았을까.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은 또 다른 내가 됩니다. 다른 기분, 다른 업무, 다른 하루, 다른 날씨, 그리고 토요일이 오면 다시 지도만 보고 떠나겠지요. 내일도 오늘처럼 성숙하다고 믿는 다재다능한 정신세계를 버티면서 평온한 저녁을 맞이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