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1994

약육강식

자다가 눈을 떴다. 어떤 사람들의 얼굴과 말투, 습관이 생각나는데 무슨 사이였는지 기억이 없다. 오래 알고 지냈는데 이름과 나이를 모른다. 요즘 말을 하려다가 그만둘 때가 많다. 했던 말을 또 하고 썼던 글을 또 쓰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안 하고 글을 안 쓰는데 생각을 하다 보면 앞에 보이는 게 실재인지 신기루인지 헛갈릴 때가 온다.

연휴 중 횡단보도 앞에 늘어선 차들을 본다. 불빛이 옹기종기 모여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을 비춘다. 강자가 약자를 구경하면서 덮칠 때를 노리는 모양새다. 자주 가는 카페의 일인석이 모두 유리 외벽을 바라보는데 거기 앉아있으면 쉽게 보는 장면이다. 그 카페를 다니면서 다양한 시위가 부지런히 일어난다는 것도 알았는데, 해 지기 전 마지막 시위대가 지나가는 걸 보면 반갑다. 내막은 몰라도 보람찬 행진일 거다.

입춘

일요일 오후, 석양을 보러 영흥도를 찾았는데 바닷바람이 이렇게 매운지 몰랐어요. 얼굴이 사라지는 느낌인데 사진은 찍어야겠고, 해서 고생을 좀 했나 봐요. 머리가 아파옵니다. 섬 반대편은 비교적 평온하길래 항구에서 걷기는 했어요. 알고 보니 입춘이었다고. 저는 부지런함과 거리가 멀어요. 계획을 세우는 일도 없고, 그때그때 끌리는 곳을 다녀올 뿐이거든요. 둘러보고 걷고 냄새 맡고, 사진도 찍고 밥도 먹긴 하는데 작년, 재작년보다 감흥은 덜해요.

달의 바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 첫 장에 나오는 문단인데, 얼마 전 퇴근하고 쌀을 씻다가 생각났습니다. 팔 년쯤 전 아주 좋아했던 소설이거든요. 다른 삶, 더 재미있는 삶이 있을 것 같아서 직업을 바꾸고 싶단 생각을 종종 합니다. 막상 가까이 가보면 생각했던 것과 다를 텐데 말이죠. 저거 괜찮아 보이는데, 이거보다 재미있겠는데 하는 것들,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한 부분인데 멀리서 구경하는 자에겐 호기심이 되나 봅니다. 내 삶과 직업을 ‘저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람도 어딘가 있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욕심인지 열정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원래 하던 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그게 허상인지 그럴싸한 계획인지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이 다 되길 기다립니다. 마침 TV에선 영화 ‘본 슈프리머시’가 나옵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많은 신분을 가진 제이슨 본은 어떤 기분으로 살았을까.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은 또 다른 내가 됩니다. 다른 기분, 다른 업무, 다른 하루, 다른 날씨, 그리고 토요일이 오면 다시 지도만 보고 떠나겠지요. 내일도 오늘처럼 성숙하다고 믿는 다재다능한 정신세계를 버티면서 평온한 저녁을 맞이하길 기대합니다.

뜀박질

지난 주말엔 화천 붕어섬과 동해시의 묵호항이란 곳을 다녀왔고, 어제는 충주호를 끼고도는 비포장도로를 달렸어요. 그리고 오늘은 철새 합창이 생각나서 군산 새만금을 갔는데 폭설 때문인지 새가 몇 마리 없었어요. 운동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주기적으로 하는 건 없고 뜀박질 좋아해요. 이사 오기 전 석촌호수 옆에 삼 년쯤 살았는데 그땐 호수길 따라 뛰는 게 좋았어요. 지금 사는 곳은 산골이라 주변 뛸 곳이 마땅치 않은데, 핑계겠지요. 대신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하려고는 해요.

어서 추위가 사라지면 좋겠어요. 주말마다 곳곳을 다녀도 몸이 얼어서 흥이 덜해요. 기분이 오락가락하지만 음악 크게 틀고 운전할 때와 집에 돌아와 쉬는 동안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