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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내가 사는 집은 방 하나가 남동향, 나머지 방들과 거실이 남서향이라 오전과 오후의 증거가 확실하다. 남동향으로 창이 난 방은 ‘아카이브’라 불리는데 이곳에 빛이 드는 건 아침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주말 아카이브’의 아침을 봤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이 빠른 속도로 내 상상력을 잠식해갔지만 나는 몰랐다. 며칠 지나고 보니 상상을 축내는 대신 내 하루를 바꾸고 있었더라. 차를 달려 눈바람 치는 섬에 도착해 아직 중천이 먼 해를 본다. 사실 구름에 가려 저기쯤 있겠지 상상만 했다. 서울은 맑고 화창했다는데 내가 간 곳들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남쪽 동네도 겨울은 겨울이다.

‘주말 아카이브’의 아침을 맞이한 토요일부터 다음 날인 일요일, 그리고 다시 돌아온 토요일까지 삼일 동안 이천 킬로미터를 달렸다. 왠지 오래전부터 반복돼 오던 일 같다.

기차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다. 짐을 대강 풀고 침대에 오르면서 보니 머리맡에 아이폰 독(dock)이 있다.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기계다. 분위기를 낼 수 있겠다 싶어 내 아이폰을 꽂고 음악을 고른다. 최근 다운만 받아두고 거의 듣지 않은 앨범이다. 당시 꽤 좋아했던 밴드라 같이 들으려고 일부러 아껴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몸 깊숙이 남는 음악이 있는데 최근엔 그 앨범의 일 번 트랙이 그랬다. 인생에 두 번쯤 올까 말까 한 새로운 시작, 올해는 나의 해가 된다 믿었던 순간. 오늘 아침 우연히 그 노래 제목을 발견하고 잠시 떠올린다. 아련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되돌릴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궁금하기도 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삼십 분이나 했다.

일상

별 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쉽게 좋아지고 가라앉는다. 어제까지 좋던 사람이 갑자기 싫어지고 방금 전까지 별로던 사람이 괜찮아 보인다. 기대가 크면 실망하는 법인데 포기하면 좋아진다. 때때로 외로운 듯 서글픈 기분이 들고 또 금세 사라진다. 춥다가 더운 건 일상이고 나는 이 경험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별 게 아닌데 별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커피를 마신 지 반년이 지나가는데 매일 느끼는 맛은 다르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기분이 변하는데 종종 다음 기분을 알고 있어서 음악을 건너뛰기도 한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이고 거창하다면 한없이 거창한 일이 매일 일어난다.

혼자가 아닌 나

차를 몰고 출근을 할 때면 한강을 두 번 건너게 된다. 잠실에서 자양으로, 다시 마포에서 여의도로. 잠실대교에서 마포대교에 이르기까지 강을 왼편에 두고 달리는 기분이 꽤 좋다. 오늘은 아침부터 퇴근 전까지 집중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는데 오후 여섯 시가 되자 설문지를 작성하라고 한다. 여러 요소에 대한 평가를 적던 중 맨 아래에서 업무 환경 개선에 대한 문항을 본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망설이다 보니 의외로 내가 회사에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관리자는 할 일을 할 뿐이고 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걸 잘 만들어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동료들에게 바라는 점을 썼다. 나에게 좋은 환경이란 언제든 협업할 수 있게 준비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니까.

이번 주는 자유를 뒤로하고 일에 집중해야지, 했는데 설문을 마친 사람들이 퇴근 준비를 하길래 덩달아 짐을 싸고 나왔다. 어차피 고단한 한 주가 될 테니 하루 더 쉬는 게 뭐 어때 싶기도 하고 어제 읽은 소설들이 눈에 채이기도 하고, 그래서 오는 길에 단편집을 하나 더 사서 집 앞 스타벅스에 앉아 한참을 읽으니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읽으면 왠지 다가오는 주말까지 허기질 것 같아 적당히 읽고 나오기로 한다.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이 동네가 십삼 년 전 만나던 아이가 잠시 살던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매일 지나치던 PC방들도 가만 보니 당시 내가 갔던 곳들이다. 누군가 구석 자리에서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틀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