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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

“저는 이 년 뒤 티베트 가려고요. 히말라야에서 티베트까지 여행하는 단체가 있대요. 거기 따라가서 다큐 찍으려고요.”
“넌 꼭 할 거 같아. 나는 이 년 뒤 지프 랭글러 타고 미국을 횡단하고 있을 거야. 그때 둘 다 지금 말한 대로 하고 있으면 재밌겠다.”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사는데 그 여행이 일로 이어지는 직업 없을까?”
“전 그래서 다큐 피디가 되기로 했어요. 제일 가깝고, 여행이 일 자체더라고요.”
“정말 그렇겠네. 아, 프리랜서를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여행이 곧장 일이 되진 않더라도. 일단 사무실에 앉아있는 건 싫어. 어디든 다니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데 말이지.”
“제 주변에 그렇게 사는 동생 있어요. 번역으로.”
“번역. 그래, 소설에서 그렇게 여행 다니다가 어딘가 머물러서 한 권 번역하고, 그런 인물 본 거 같아.”
“네. 그 동생도 여행까진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멋지네. 조금 부럽다.”

“자야겠다. 넌 언제 일어날 거야?”
“전 일정이 좀 여유로워서 일곱 시쯤 일어나려고요.”
“나는 내일도 한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운이 정말 좋으면 나로도랑 여수까지 갈 수 있겠지.”
“저는 일단 고모님 댁 찾아뵙고 강진으로 해서 돌아볼까 해요.”
“우린 그럼 여기서 안녕이네. 기분 묘하다. 잠들 때 안녕, 하고 일어나면 둘 중 하나는 없겠지.”
“저는 그런 적 많아요. 영국에 있을 때도 그랬고.”
“서로 일정이 다를 테니까.”
“그렇죠.”
“일찍 눈 뜨길 바라야겠다.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응. 좋은 밤.”

밤새 잠을 설쳤다.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잠이 깨다가 결국 알람보다 이십 분 일찍 일어났다. 옆에는 한울이 입을 벌린 채 자고 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빠져나왔다. 좋은 이야기에 고맙고,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고, 그리고 남은 시간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며.

여수

나는 높은 곳이 무섭다. 그래서 건물 창가에 가질 못하고 육교를 건너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돌산대교를 걸었다. 돌산도에서 본토까지, 바다를 건넜다.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조금 기대도 했다. 막상 건너면 괜찮을지 모른다.

그렇게 무서울지 몰랐다. 매 걸음 바다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고 다리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옆으로는 차들이 끝없이 지나간다. 이걸 왜 건너려 했나, 후회를 반복하다 고개를 드니 반대편 끝이 까마득하다. 다리의 중심부에선 큰일이 생길 것 같다. 멀리서 누가 손수레를 밀고 온다. 수레 너비가 보행길에 꽉 차는 듯하다. 점점 가까워진다.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다리 안쪽으로 피하기로 한다. 바깥이나 안이나 무섭긴 마찬가진데 바깥으로 피하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서다. 다리의 중심부를 지나자 몸이 떨린다. 차가 지날 때마다 다리가 흔들린다. 허벅지가 긴장되고 아프다. 바다를 잊었다. 길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뛰고 싶지만 다리가 무너질까 두렵다. 눈앞이 뿌옇다. 몸을 기울이고 계속 걸었다. 몇 초면 된다, 생각한 뒤로 한참을 지나 다리가 끝났다. 계속 걸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겠다 싶을 때까지 걸었다. 마음이 진정되어 뒤를 봤을 때 다리는 멀리 잘 있었다. 차들은 여전히 잘 달렸고 다리는 앞으로도 끄떡없을 듯했다. 등이 땀으로 축축했고 배가 고팠다.

그러니까 왜

“그걸 왜 하고 싶어?”
“글쎄. 그냥, 진짜 그냥 하고 싶어.”
“그럼 그걸로 직업을 갖고 싶은 거야?”
“모르겠어. 이건 뭐랄까, 그냥 마음이 너무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거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는 생각. 오래전부터 그랬어. 직업으로는 사실 자신 없고.”
“가끔 오빠 얘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아져.”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 그렇겠지.”
“그런가?”
“응. 빙빙 돌리기만 하고, 돈 안 되는 얘기이기도 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서 그런가 보다.”
“그렇지 뭐.”

미디어

S 대학의 교수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가 부끄러워 당일 취소를 한 적이 있다. 한 국제 학술 토론회에 참석해서 기자인 척 맨 앞 줄에 앉아 C 대학의 교수와 눈을 마주치려 애를 쓴 적도 있다. 당시 C 대학의 교수 옆에는 한 해 전 진학 상담을 할 뻔했던 S 대학의 교수가 앉아 있었다. 두 교수 중 누가 내 스승으로 적합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다. Y 대학의 교수는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한 페스티벌을 찾아가 멀리서 구경만 했다. K 대학의 융합과정 입학 설명회를 들으러 간 적도 있다. 나는 매번 느렸고 그들은 빨랐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비밀이라면 비밀이고,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