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걸어서 회사에 다닐 때 규칙이 있었다. 건물은 정문으로만 다닌다는 건데,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렇게 하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지각을 하더라도 당당히 정문으로 하자, 뭐 그런 생각도 했다. 그래서 건물이 멋진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외관이 웅장하면 정문을 통과할 때 어깨가 으쓱할 테니까. 실제로 이 어깨뽕은 내 회사생활에서 꽤 많은 걸 상쇄해주었는데 일단 출근할 때 멋진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했고, 점심때 다른 문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정문을 볼 때면 ‘내가 아침에 저길 통과했지’ 생각에 다시 으쓱해지기도 했다. 야근하고 새벽에 퇴근할 때도 나는 꼭 정문을 이용했는데, 늦은 시간이라도 이렇게 정문을 통과하고 나면 역시 멋진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빠르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느끼는 감정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낼 때 드는 시원함과도 비슷했다.
이직하면서 다음 회사를 고를 때도 규칙이 있었는데 우선 단독 사옥과 사내식당이 있어야 했고, 식당이 없다면 카페라도 있어야 했다. 이왕이면 사람도 많아서 건물이 북적이길 바랐으며 무엇보다도 잘 알려진 회사였으면 했다. 길 가다 아무나 붙잡고 얘기해도 다 아는 그런 곳을 다니고 싶었다. 그냥 업무의 고충이나 야근의 피로 같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를 상쇄해줄 뭔가가 필요했는데 나는 그걸 사옥과 사내식당, 그리고 이름으로 정했을 뿐이다. 회사를 잘 다닐 수 있을지 언제 또 그만두고 싶을지 몰라서 뭐든 으쓱할 거리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오랜 시간 잘 버티고 싶었고, 최소한 아빠만큼은 해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한때는 순수한 개발자라고 돈보다 명예, 그보다 마음의 소리를 좇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저 민망한 소리일 뿐, 업무의 세계에서 돈과 보상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단독 사옥도 사내식당도 없다. 건물은 크지만 다른 회사와 나누어 쓰고 있고 사내식당 대신 큰 카페가 있다. 이곳에 오고부터 밥을 잘 먹지 않게 되었으니 식당이 없는 건 이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도 올겨울이면 새로운 사옥이 생긴다고 하니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다시 규칙을 만족하게 되는 셈이다.
가끔 내가 얼마나 세속적인지에 관해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약할 때면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구나, 싶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는 결론에 닿는다. 거울을 보다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만큼 기분이 별로일 때가 잘 없는데 나의 세속성을 탐구하다 보면 부끄러움은 그저 일상인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순수함보다 세속적인 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으니 나름의 성과라고는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마지막 이직을 할 때 다음 회사로 가장 많이 고려했던 조건은 스타트업이었다. 작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도전을 경험하고 그걸 창업에 활용하자는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 우주에 금이 가는 사건을 맞이하면서, 나는 또다시 반듯하고 그럴싸한 명함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회사를 선택한 지도 벌써 5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나에게 있어서 5년이라는 시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전학을 경험한 뒤로 어느 기관에서도 가져보지 못한 최장 기록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남다르고 크다. 이 회사에 남아있는 한은 앞으로 보내는 시간이 모두 처음이자 신기한 기록인데 여기에도 세속성을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년 전부터 가끔 정년퇴직의 꿈을 꾼다. 내가 있는 업계는 아직 정년을 경험한 사람이 없어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오래지 않아 첫 대상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 어쩌면 나는 그전에 더 재미있는 다른 길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때때로 흥미로워서 한두 가지 직업만 경험하고 살기에는 어쩐지 아깝기 때문이다. 또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길기도 하다. 이 업계에 정년퇴직자가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모르겠다. 재미있는 무언가를 좇다가 그걸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모였지만 회사는 결국, 재미와는 거리가 먼 곳이니까.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누구나 언젠가는 알게 된다. 그러니까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