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오르내린다. 누군가 내 다리를 흔들고 있다. 머리카락이 빛을 낸다. 어디선가 색종이가 날아와 춤을 춘다. 스피커를 향해 걸었다. 내 키보다 큰 사람이 앞을 가로막는다. 지나, 여전하네. 벽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멀어진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는다. 머리를 땋아 올린 남자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조명이 빠르게 움직인다. 벽이 무너졌다가 생겨나고,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음악이 빨라지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스피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들어다가 무대 위로 올린다. 바닥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 다리가 스스로 춤을 춘다. 머리를 땋아 올린 남자가 웃는다. 천장에서 소나기가 내린다. 입 안에 색종이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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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놓아줘
연식이 오래되어 그렇단다. 쭈글쭈글한 것은, 피부가 수분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학의 힘을 빌리면 살아나겠지만 잠시뿐이란다. 주어진 삶과 실제 경험의 차이가 클수록 언젠가 받을 실망도 큰 법이라고, 자연의 이치가 변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아직은 잘 익은 한 쌍이지? 그가 바구니를 보면서 말했다. 오늘이 아무리 좋아도 붙잡을 수는 없어. 변해가는 걸 보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내일은 얼마나 더 예쁠지, 나는 그 생각에 잠도 안 오거든.
수분은 결국 사라지고 우리는 먼지로 돌아간다.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종이 아래로 나뭇결이 비친다. 연습한 대로 한 손을 허리에 올렸다. 그가 지켜본다고 생각했다. 가운데가 비어있는 바퀴를 그렸다. 고무는 시간이 지나면 변하니까 단단한 쇠로 바깥을 둘렀다. 그리고 속을 대추로 채웠다. 오늘을 과감히 놓아줬어. 나도 요즘 잠을 못 자. 내일은 얼마나 더 예쁠까?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 없다. 가위를 꺼내어 그림을 오려냈다. 종이에 닿는 마찰이 지나간 시간을 나무라는 듯하다. 남는 자리에 바구니를 그리고 편지를 썼다. 팽팽한 대추에서는 사과 향이 나지만 쪼그라든 대추는 씹는 맛이 있어. 달짝지근하면서도 여운이 남지. 우리는 지금 어디쯤일까.
아무도 없다
하루하루 살다 보면 내가 소진되는 것 같을 때가 있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사실 버거울 때가 많다. 모든 시간은 나름의 가치가 있어서 최선을 다해 살면 반드시 답을 얻는다는데 문제는, 삶이 너무 길다는 거다. 사람들은 그게 인생이라고 하더라.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된다고. 너는 어떤지,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나는 어릴 적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어서 가끔 스스로 놀란다. 어깨 툭 치고 놀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는 조용하기만 하다. 가끔 바람도 불고 비도 오는데 사람 소식은 없다. 문이 열리면 바람인가 보다, 밖이 시끄러우면 비가 오는가 보다 하는데 사람은 오지 않는다.
가끔 베란다 구석에서 시들어버린 난초를 생각한다. 처음 꽃집에 갔을 때 유독 눈에 띄었던 녀석이다. 직원은 애써 물을 주지 않아도 잘 큰다며 비가 올 때 창문만 열어두라고 했다. 그러면서 봉지를 들려주었는데 영양제를 넣은 흙이라고, 화분마다 조금씩 섞어주라고 했다. 하지만 비가 오면 나는 집에 있지 않았고, 창문을 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구석에 있다는 건 마음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며 시들었다는 건 오래 방치됐다는 뜻이란다. 내 욕심이 그를 외롭게 했지만, 나는 어떤 원망도 받지 않았다.
면도를 하지 않는 사람
머리를 짧게 자른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온다.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걷다가 멈추다가 한다. 멈춰있을 땐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데 본인도 알고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제 보니 키가 꽤 크다. 문을 나올 때는 구부정해 보이더니 걸음을 옮기면서 점점 자세를 잡아간다.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바지, 무늬는 어디에도 없다. 삼 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했다. 구부정하게 나와서는 걸으면서 키가 점점 커지길래 신기하다고 웃었다. 내가 정 선생, 하고 부르면 돌아오는 말은 이 선생이었고 할 말이 없어서 먼 산을 보고 있으면 그는 거리의 사람들을 빤히 관찰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장단에 맞춰 손뼉 치는 능력이 가히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진지한 장면이지만 보고 있으면 웃지 않을 수 없으니 역시 특별한 능력이라 하겠다. 그는 일 년 전부터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아끼는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인생의 흔치 않은 다짐이라고 했다. 거리에 사람도 없을 시간이라 그의 희멀건 피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수염은 생각만큼 많이 자라 있지 않다. 걸으면서 자꾸 두리번거리는 건 어딘가 내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면 아침을 잘 보내야 한다. 매일 오 분의 시간을 내어 우리는 겁 없는 상상을 해야 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전에 창을 열고 새벽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러면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된다. 너는 새벽을 모른다고 하겠지만 새벽은 어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슬플 수는 있어도 그 감정이 나를 무너뜨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솔직하게 살아도 괜찮다. 기분이 좋을 땐 웃고 그렇지 않을 땐 울면 그만이다. 많은 것이 그의 머리에서 나와 내게로 들어왔다. 그를 세상에 소개하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그는 내 얼굴을 모른다. 나는 언젠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겠지만 그는 내 얼굴을 영영 볼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알고 지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