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Blog

사유하는 가죽

사유하는 자는 두려움을 모른다. 이름 모를 동물은 자신의 가죽을 들고 거울 앞에 선다. 뻣뻣한 털 아래로 온기가 남아 있다. 눈이 눈을 보고 입이 입을 말한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가죽이 빈 공기에 대고 묻는다. 거울 위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이 웃는다. 두려운 자는 생각하는 법을 잊었다. 동물은 비스듬히 서서 자신의 털을 고른다. 제 이름부터 알려 주십시오. 쓰고 남은 것이라도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거울 앞에 선 자는 부끄러움을 참는다. 주인 없는 가죽이 온기를 잃어간다.

페일 그린이라고 합니다. 그 색깔이오. 저는 어둡게 하고 싶었는데 전 주인이 반대해서요. 거울은 유리만 갈면 감쪽같을 겁니다. 산 지도 얼마 안 돼서 거의 새것이거든요. 후덥지근하죠? 이 방이 환기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문을 꼭 열어두어야 해요. 밖에 걸린 건 이따 오후에 치울 겁니다. 인부가 오기로 했어요. 냄새는 금방 빠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마 큰 동물을 키웠던가 봅니다. 청소는 한 번 더 해둘게요.

해가 사라지고

벨이 울린다. 익숙한 냄새를 맡는다. 높은 천장 어디엔가 창문이 있다. 쇠붙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벽을 두드린다. 응답이 없다. 주먹으로 벽을 세게 두드린다.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온다. 어딘가에서는 해가 뜨고 진다. 바람이 불면 구름이 부서지고 비도 내린다. 문이 열리고 식판이 들어온다. 사람은 해를 듣고 그린다. 바람처럼 휘파람을 불고 구름처럼 숨을 몰아쉰다.

창문을 연다. 익숙한 소리를 듣는다. 높지 않은 곳에 달이 있다. 벨이 울리면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람은 빛을 그린다. 주먹을 쥐고 벽을 두드린다. 숨소리가 바닥을 타고 넘어온다. 어딘가에서는 해가 사라지고 나타난다. 바람은 고개를 들고 숨을 참는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비가 내린다. 비를 맞은 바위는 굳었다가 녹고, 녹았다가 굳는다. 사람은 벽에 귀를 대고 숨을 참는다. 발아래에서 검은 바다가 울부짖는다. 어딘가에서는 해가 뜨고 진다.

보이지 않는 것

아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당신이 찾는 건 속세에 있지 않아요.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책에 진리가 있다고 하지요. 진리, 그게 뭔데요. 책에서 본 적은 있답니까. 편히 앉아 봐요. 아까 당신이 그린 걸 떠올려 봅시다. 생김새와 구도, 색깔, 어디까지 생각납니까. 다시 그려볼 수 있겠습니까. 혹시 말이죠. 거짓과 허구가 당신을 아프게 합니까. 비어있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이 당신을 병들게 합니까. 누군가 그럽니다. 진리의 반대말이 허구라고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게 그 허구라면 진리는, 당신을 웃게 할까요.

우리는 감춰진 것을 두려워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원하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왜요?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몇 시간 뒤 삶을 마감합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이때까지의 나를 닫고, 끝냅니다. 다시 눈을 뜬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어제 원했던 게 뭔지 생각납니까. 어제 떠올린 음식을 지금 먹으면 어제 상상한 맛이 날까요. 우리는 매일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마감했다가 또다시 태어납니다. 여태 그래왔어요. 그러니까 깊게 생각해봐야 의미 없다는 말이에요. 다 사라지는 겁니다. 차라리 귀의하세요. 나는 진리를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만, 내일은 또 몰라요. 매일 새로 다가가겠지요. 당신은 내가 아니고 내일의 당신도 아닙니다. 미래의 누군가에게 숙제를 넘기진 말자고요.

로코모티브

지칠 때까지 달려봐. 그럼 알 수 있다. 로코모티브. 편지 뒷면에 그가 남긴 것은 번호가 아니라 단어였다. 식어가는 커피를 앞에 두고 그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는 동력, 그런 게 내게 있을 리 없지 않냐며 눈을 반짝인다.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을 국토대장정에 비유하던 그는 특전사에서 십여 년을 보냈다고 했다. 단어로만 들었지 그게 뭘 하는 집단인지 내게 알려준 적도 없으면서, 로코모티브. 그는 자신이 멈추지 않는 바퀴 같다고 했다. 만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의 인생은 내리막이라고, 경사가 급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멈추지 않는 바퀴는 천천히, 끝을 모르고 굴러간다고 했다.

로코모티브. 언젠가 멈출 날도 오지 않을까요. 연료가 부족하다든가 바퀴가 고장 난다든가, 멈춰서 한숨 돌릴 시간도 언젠가 생기지 않을까요. 나는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어릴 땐 어땠는지부터 대학에서 제일 좋아했던 수업은 무엇인지, 자주 입는 티셔츠는 어디가 좋아서 샀는지, 나를 볼 때마다 눈동자가 떨린다는 걸 아는지, 그렇게 묻고 싶은 게 많아서 가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 이렇게 답장을 받는데 뒷면에 꼭 암호 같은 말이 적혀있는 것이다. 로코모티브. 지난 주말 우리는 달맞이 운동에 합의했고, 그 시작으로 같이 호수를 한 바퀴 뛰기도 했다. 먼저 숨찬 사람이 커피를 사는 거라고, 그가 자신만만해 보였던 것은 내게 커피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내가 한 말 잘 생각해보고.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해. 뭐든 끝이 있는 법이지만 네게는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으면 한다.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그는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어떤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 내게 물은 적도 없으면서 꽤 많은 걸 아는 듯했다.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심지어 나는 그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우리는 메신저로만 얘기하는 사이였으니까. 내가 너무 빨리, 쉽게 빠져버린 게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의 손이 유난히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호수를 뛰고 난 다음이지만 몸이 금방 식어 있었고, 그것은 아직 봄이어서라기 보다 내 불안한 심리때문이었을 테니까.

모르겠으면 전화해. 메신저가 편하면 문자 보내든지. 번호는 뒷장에 있다. 로코모티브. 그의 닉네임이 바뀌어 있다.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는 동력, 내게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건넸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내일 다시 호수를 뛰어 보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