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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기억의 분실

오랜만에 사진관을 찾았다. 작년엔가 새로 생긴 곳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거울 앞에 서서 웃는 연습을 해본다. 머리를 매만지다가 안경을 벗을까 생각도 잠시 했다. 의자에 앉아 렌즈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묘하다. 어딘가 익숙한 긴장감이다. 언젠가부터 사진에 남겨지는 게 두려웠다. 어릴 땐 찍히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 한쪽에 박제된다는 사실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벽에 걸린 사진들에는 봄이 한창이다. 바깥 날씨만큼이나 사진관에도 햇살이 가득하다.

눈을 뜨니 오후 두 시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찾아오는 졸음은 커피로도 해결이 안 된다. 꿈에서 오랜만에 사진관을 찾았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활짝 웃는 얼굴에는 주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진 싫다는 사람이 잘도 웃었네, 생각하면서 탕비실을 찾았다. 요즘은 커피 대신 핫초코에 정을 붙이고 있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디선가 흘려들은 기억이 난다. 그건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부지런한 자의 몫이라고 했다. 행복의 원천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각자 ‘○○씨가 보는 세상’ 따위의 다큐멘터리 PD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매일 되뇌는 주문과도 조금 비슷하다. 나를 즐겁게 하라. 끊임없이, 나를 웃게 하는 이벤트를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

오래전 동료 중에는 미숫가루를 유난히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꼭 미숫가루를 머그잔에 두 숟갈 담아다가 물을 붓고 저으며 세상 온화한 미소를 지었는데, 지금 내 표정과도 비슷했던 것 같다.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의자 위에 개어둔 담요가 비실비실 웃고 있다. 꿈에서 남긴 사진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 계속 떠올린다. 카메라가 비추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사진에 나를 담는다는 건 가끔 슬픈 일이기도 하다. 박제된 기억 속에서 나는 웃고 있지만 꿈은 스쳐 갈 뿐, 오늘도 나는 기억을 분실하고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기대어 앉았다.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편지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며칠째 하늘이 맑다. 미움에 관해서는 이제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도 왜 너를 떠올리면 거부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다시 바스락 소리가 난다. 이번엔 바로 옆인 것 같다. 어디선가 읽기로 느티나무는, 잎이 넓은 타원을 그리는데 끝이 둥글단다. 청설모 한 마리가 바쁘게 지나간다. 편지의 글자가 춤을 춘다. 누군가 시간에 쫓겨 급히 쓴 것 같다. 나도 미움을 그리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생각하다가 고개를 든다. 구름이 느리게 지나간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난다. 연필을 깎다가 손이 조금 베었다. 반창고 대신 나뭇잎을 대고 끈으로 묶는다. 편지지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너를 처음 본 건 옷장에서 반소매 티를 막 꺼내던 때였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 어디서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미움을 잊었다. 너에 관해서도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도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것을 뜻한다고, 언젠가 너는 말했다. 내 마음은 아름드리야. 너는 나를 안을 수조차 없을걸. 청설모 한 마리가 바쁘게 지나간다. 잠시 손을 떨고 있었다. 날이 꽤 좋은데, 생각하다가 하늘을 본다. 구름이 멈추어 있다.

고모가 다녀가서

그의 집은 옥탑방이어서 계단을 수없이 올라야 했다. 언젠가, 아직 몇 번 만나지 않았을 때쯤 그의 방에서 한 납부 고지서를 봤다. 주소는 그의 집이 맞는데 수신인이 달랐다. ‘황현주가 누구야?’라고 물었을 때 그는 ‘고모.’라고 답했지만, 그의 성은 황 씨가 아니었다. 그날 그의 방 한쪽 벽에는 머플러도 걸려 있었는데 그 물건 역시 ‘고모가 다녀가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한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씨 되시죠?”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저, ○○이 사귀는 사람입니다.”
“네?”
“○○이 많이 좋아하시죠? 죄송하지만, 그만 만나주셔야겠습니다.”
“누구시라고요?”
“그럼, 연락 그만해주세요.”

전화가 끊긴 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에서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들릴 뿐이었다. 먹다 남은 라면을 보는데 목이 막혀왔다. 한 시간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그였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며 우는 그에게 나는 그 여자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내가 ‘황현주야?’라고 묻자 짧게 ‘응.’이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세컨드도 아니고 써드, 동시에 만나는 세 번째 연인이었던 셈이다. 그것도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입고 있던 니트가 원망스러웠다.

C Major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같이 들어보고 싶었어요. 1이라는 숫자는 특별하잖아요. 첫 감정, 첫 선물, 처음이라는 의미로서요. 저는 폴 루이스와 BBC 교향악단이 연주한 버전을 좋아해요. 들어 볼래요?

두끼 떡볶이집에 둘이 가서 야채를 두 번 담고 만두도 두 번 담아왔다. 같이 명동에 간 두 번째 날이었다. 오후 두 시쯤 배가 불러왔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나는 이날 그를 두 번 만났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다시 한번. 쿠키 영상 같은 하루였다.

명동은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와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가 각각 회차하는 곳이다. 한 버스에서 다른 버스의 번호를 뺀 숫자는 2로 시작해서 2로 끝나는데 그 중간에 0이 있다. 열심히 껴 맞추다가, 두 가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