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새가 높이 난다. 언젠가 카페 창가에 앉아서 바깥을 보던 중 그가 물었다. ‘너 아름다움을 본 적 있어?’ 나는 음악에 집중하다가 그의 말을 놓쳐 ‘뭐라고?’를 두세번쯤 반복했는데 나중에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지금 이 노래, 우리, 여기 있는 시간. 나에게는 네가 제일 큰 아름다움이야.’ 그리고 이때 그가 지은 표정은 내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큰 황당함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카페에서 듣던 노래는 아직 머리에 남아 있다. 그는 노래 제목을 우리말로 하면 ‘가장 예쁜 사람들이 가장 높이 난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우리는 스물세번째 여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탐구욕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걸을 때는 물론이고 운동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꼭 타야 하는 버스를 향해 뛰고 있을 때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때 내 휴대폰에는 ‘이런 생각이 났어. 네 의견은 어떠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와 같은 문자가 가득하기도 했다. 내가 연락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그 나름의 배려였다. 언젠가 그에게 묻기를 ‘왜 그렇게 생각을 놓지 못해?’라고 했더니 그는 ‘하루하루 받는 감정을 모두 써두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한동안 키보드를 안고 잘 정도로 그가 글쓰기에 빠져 있었을 때다. 나는 가끔 그의 글을 읽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시 글에 많이 등장하던 주제는 아름다움이었다.
한 번은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과학기술이 발전하다 못해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가질 수도 있게 됐어. 사람들이 각자 아름답다고 느끼는 기준, 그런 것들인데 신청서만 작성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이걸 얻으면 앞으로 다시는 추함이나 못생김을 볼 수 없게 되기도 해.’ 이어서 그는 나에게 물었다. ‘어때, 너는 갖겠어?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갖고 싶을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갖지 않을래. 추한 게 있어야 바로 살 생각도 하지.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면 발전도 없지 않을까? 나는 추함도 필요해, 선과 악의 균형처럼.’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름다움을 갖지 않겠다고 하면 모든 게 추해 보이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그는 ‘아니. 지금과 같아. 변하는 건 없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렇게 답했다. ‘응. 그럼 안 가질래.’
그에게 나는 반대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다. 여러 면에서 호기로웠던 그와 다르게 나는 의견을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는데, 다툼이 생길 때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나는 바보 같기만 했다. 그의 잘못임이 분명한 일에 대해서도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뭐든 쓴소리를 해야 했지만, 막상 내게서 나오는 말은 그저 ‘괜찮아’와 ‘미안해’의 반복이었다. 이런 나를 두고 그는 ‘사랑하면 판단이 흐려진다.’라고도 했는데, 나는 잠깐 발끈했지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는 않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헤어지면서 ‘너는 아름답게 살고 있니?’라고 물었더니 그는 잠깐 웃다가 이렇게 답했다. ‘아니. 나는 마음대로 살고 있어. 그런데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거야. 너에게 내가 아름다워 보인다면 나는 아름답게 사는 거겠지.’ 그날 밤 나는 어딘가 말끔하지 않은 기분에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고 그의 마지막 대답은 다음 날 저녁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해 여름 우리는 의견 다툼이 많았다.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때도, 거리를 걸으면서도 시시콜콜한 이유로 서로를 아프게 했다. 그러던 중 이제 그만 만나자는 합의에 이르렀고, 나는 며칠 동안을 심하게 앓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갔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거리에 구세군이 등장할 때쯤 내 머릿속에 그는 이름 세 글자로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