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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할 말이 많은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게 힘들다. 그래서 차라리 숨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못다 한 이야기는 금세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를 잊는다. 이야기는 홀로 남아 세상을 여행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남아프리카에 닿았다가 큰 바다 건너 아마존에 닿았다가 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데 이야기만 남아 무얼 하느냐 묻는 사람을 본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이야기가 사람에게 말한다. 단지 형체가 없어서 죽을 수도 없을 뿐, 난 당신이 부러워요. 사람은 처음으로 이야기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은 기억과 닮았다. 애를 쓰면 손에 잡힐 듯하고 고개를 돌리면 금세 스쳐간다. 기억은 종종 너무 쉽게 왜곡되어 실제와의 연결을 잃는다. 나는 가끔 존재한 적 없는 일을 떠올린다.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모두 펼쳐두고 싶지만 기억은, 그저 흐를 뿐, 남은 것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시간은 기억을 편집하고 나는 시간을 쫓는다.

트윈스

어릴 때 아빠가 야구 좋아하냐며 회원가입을 시켜준 일이 있었다. 언젠가 큰 상자가 도착했고, 그 안에는 어린이 회원이라며 가방부터 시작해 회원카드, 스티커, 사인볼, 모자, 티셔츠, 재킷, 신발 등이 들어있었다. 아빠는 야구단 책자를 펼치고 내게 트윈스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는데 아직 기억나는 건 1990년 우승과 홈런왕 이광은이다. 한동안 나는 야구단 책자를 마르고 닳도록 뒤적이며 선수 이름을 외웠다. 책자 여기저기엔 트윈스 로고와 함께 방망이를 든 쌍둥이 로봇이 등장했는데 대문자 L의 생김새가 유난히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성씨의 첫 알파벳과도 같아서 공책에 수없이 그리며 연습한 적도 있다. 그해 사진첩 곳곳에서 나는 트윈스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데, 아빠 차를 타고 어딘가 갈 때면 항상 사인볼을 들고 다닌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윈스에 어린이 회원 제도가 막 생긴 때였던 것 같다.

몇 년 뒤 우리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빠는 회사를 나와 대리점을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친구들과 이별을 했다. 아빠의 대리점은 너무 멀리 있어서 이제 아빠를 볼 수 있는 건 주말뿐이었다. 그래서 일 년 뒤 우리는 다시 이사를 했고, 나는 친구들과 두 번째 이별을 했다. 그래도 가끔 대리점에 놀러 가면 사람들이 아빠를 ‘사장님’ 하고 부르는 게 듣기 좋았다. 아빠는 이제 사장님이었고 대리점 창고에는 내 책상도 있었다. 얼마 뒤 아빠가 다녔던 회사의 이름이 바뀌면서 대리점도 간판을 새로 달았는데, 한때 회원이었던 야구단 이름과 같았다. 야생마 이상훈이 마운드에서 갈기머리를 휘날리던 때다. 야구는 이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가끔 티브이에서 이상훈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학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아이가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응원하던 팀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아이를 통해 ‘엘롯기’를 알았다. 꼴찌를 다투는 삼인방이라며 엘지, 롯데, 기아의 줄임말이란다. 별명이 꼴지, 꼴데, 꼴아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나도 어릴 때 트윈스 팬이었어, 너처럼 매일 야구모자 쓰고 다니고 그랬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야구도 보곤 했다. 내가 다니던 과는 고고학과 미술사학을 함께 다루는 곳이었는데 그 아이는 고고학에 뼈를 묻고 싶어 했고, 나는 다음 전공을 알아보고 있었다. 몇 년 뒤 SNS를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 목록을 보다가 발견한 그 아이는 여전히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가 야구 경기를 하길래 잠시 멈춰봤다. 트윈스가 자이언츠를 2:1로 이기고 있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그대로 틀어두고 오며 가며 보는데 점수가 변하지 않는다. 결과가 궁금해서 음료를 따라다가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를 보면서 레드삭스를 향한 주인공 벤의 순수한 사랑이 멋지단 생각을 했다. 펜웨이파크에 벤을 처음 데려가 야구를 알려주고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준 삼촌, 그런 순수한 어른이 내 주변에도 있었으면 했다. 오랜만에 그 기억을 떠올리다가 어릴 때 생각이 났다. 9회 초 자이언츠가 2아웃에서 만루를 만들었고, 트윈스가 1루 땅볼로 마지막 아웃을 잡으며 승리를 챙겼다. 다들 하나쯤은 있다는 ‘응원하는 팀’을 나도 갖고 싶어서 이 팀 저 팀 비교하던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난 이미 ‘응원해온 팀’이 있었다. 영화에서 야구단 책자를 펼치고 레드삭스의 위대함을 설명하던 벤의 삼촌이 내겐 아빠였던 것 같다.

꿈으로 지은 배

나를 왜 뽑았어요? 흰 도화지 같아서. 잘 써지고 잘 지워지는 사람을 원했거든. 면허증은 가져왔지? 네, 여기. 사진 본인 맞아? 몇 년 전이긴 한데. 앳되구나. 어디 보자, 네가 몰 배는 저기 있다. 겉에 뭐가 적혔던 거예요? 녹이 많이 슬었는데. 아, 전 주인이 꿈을 좋아해서. 꿈이오? 응. 저 배 이름이 꿈이었어. 서울에 사는 양반이었는데 뭐라더라, 하여간 글 쓴다고 연락이 끊겼어. 배를 두고요? 맡겼지. 내가 잠시 맡아주는 거야. 제가 운전하다가 그분이 다시 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제 전 주인인데, 뭐 어때. 배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있겠지. 여기 있는 배, 전부 사연 있는 거야. 배 모는 사람들은 사연도 몰고 다니지. 그러니까 뱃사람, 하면 말 많다고들 하잖아. 저도 이제 뱃사람이에요? 봐야지, 뱃사람인가 아닌가. 이삼일 되면 딱 보여. 아저씨는 언제 뱃사람이 됐어요? 난 육지인이야. 이제 바다는 가지 않아. 그만둔 거예요? 육지인이라니까. 그래서 널 뽑았잖아. 아, 네. 그리고 말이야, 아저씨 아니다. 그럼 뭐라 불러요? 글쎄, 뭐 없으면 이름 부르든가. 제가 돌아와도 여기 계실 거죠? 응. 집이니까. 참, 전 주인이 이 말 전해주라 했어. 허물어져 가는 배에도 반짝임은 있다고.

볼프강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건 음악 소리 키우기입니다. 자는 동안 틀어둔 게 아직 마음에 들면 그냥 두고, 아니면 다른 음악을 골라요. 주로 듣는 건 피아노 협주곡인데 가끔 펑크, 메탈 같은 락을 틀어두기도 합니다. 기분이 유난히 좋다거나 들뜨고 싶을 때요. 보통 때면 일어나 샤워부터 하러 가겠지만 오늘은 침대에 누운 채로 시간을 보냅니다. 공상도 하고 밤새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잠이 와서 어느새 다시 눈을 뜨는데, 그럼 또 음악을 골라요. 제 기분에 장단을 맞춰주는 게 이 아이폰의 역할입니다. 아침 시간을 갖고부터 주말이 길어졌어요. 이렇게 누운 채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뒹굴다가 잠들고 깨고, 해도 아직 낮이 오려면 멀었습니다. 어제 비와 바람이 우렁차 보여 외출을 미뤘는데 오늘도 아직 창밖은 흐립니다. 그래도 예보는 오후에 해가 뜬다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요. 여기는 게으름과 느긋함 사이 어딘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