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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목적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무서운 기분이 든다. 이 무서움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동안 사라졌다가 집을 나설 때 다시 생겨난다. 기대하지 않은 것들이 내게 다가오고 예측하기 힘든 공간으로 몸이 당겨지는 그 느낌이 매번 낯설다. 매일 어디론가 가서 무언가를 하지만 나는 그게 어디인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있다가 일을 놓치기도 한다. 목적지 없이 움직이는 하루도 사회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 하루의 목적을 알고 싶다. 회사에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내 말을 들을 수 있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어도 나와 함께 걷고 일하며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아도 나를 보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매번 고마움을 느끼지만 표현할 말을 몰라서 웃어주기만 한다. 그러면 그들도 같이 웃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 넌 아무 이상 없다고, 누구나 그런 것이니 금방 또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어떤 기분인지 자신도 잘 안다고,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덧붙인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 세상에 남아있는 한 서로 피해만 줄 뿐이다. 내 하루의 목적은 이런 것인가 싶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무서운 기분을 느끼고, 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회사에 가서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과 일하면서 잠시 고마움을 느끼고, 그 표현을 위해 웃어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증오를 느끼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라지는 게 낫겠다, 생각하면서 그들과 나를 세상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찾는 것 말이다. 언젠가 생각을 비울 수 있다면 나도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사라져야 한다. 그게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벌 받는 중

1.
“저 다른 번호로 들어왔는데 또 정지됐어요.”
“인간아, 왜 가만히 놔두지를 못해요.”
“전에 1주쯤 갔으니 이번에는 한 2주일 가려나요.”
“그러다가 영구 정지될라. 그냥 놔둬요, 좀.”
“그래도 사람들 괴롭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다른 계정이라도 만들어 볼까.”
“뭘 얼마나 괴롭혔다고 난리야.”
“아, 탈퇴도 막혔어요.”

2.
“방금 찾아봤는데, 영구 정지를 당해도 다시 가입할 수는 있대요. 아예 계정을 지워버리면 45일 뒤에 개인정보가 폐기돼서 가능해진다고.”
“그걸 찾고 있냐. 탈퇴 안 하면 되잖아요.”
“왠지 겁나서요. 아니 근데 탈퇴 좀 하면 어때서 이렇게 빡빡하게 굴까요.”
“사기꾼 잡나 보지. ○○이라던가 △△라던가.”

군산으로 가는 길

1.
“그래서 그 비밀이란 게 뭔데?”
“작년에 우리 여행 갔을 때 있잖아.”
“런던? 아니면 부산?”
“아니, 여름에 짧게 갔을 때. 주말에 말이야.”
“그 섬 많은 데 말하는 거야? 군산이었나.”
“응. 고군산군도.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나 석양 보다가 울었잖아.”
“맞아. 그때 사실 내가 일이 하나 있었거든.”
“아, 너 표정 안 좋았을 때 얘기하는 거구나. 맞지? 내가 너 무슨 일 있냐고 계속 묻고 그랬잖아. 너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고.”
“응. 그때 잠깐 만날까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랑 같이? 거기에서?”
“아니, 나 혼자.”
“일 때문에? 그런데 왜 얘기 안 했어?”
“안 만나기로 했거든. 또 굳이 말할 필요까진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그럼 그때 전화 온 것도 그 사람이었어?”
“전화?”
“응. 계속 걸려 오고 그랬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부재중 다 떴는데.”
“그건 모르겠는데. 나 부재중 기록 안 보는 거 알잖아.”

2.
“그래서 뭐가 비밀인 거야?”
“나 이사하기로 했어.”
“갑자기? 어디로?”
“군산. 우리 회사 지점이 새로 생겼는데,”
“무슨 소리야. 갑자기 군산을 왜 가?”
“들어 봐. 회사에 오래 있었던 직원이 몇 명 필요하대서 고민하다가,”
“그게 언제부터 있었던 얘긴데?”
“그때 군산 갈 때쯤.”
“그걸 이제껏 혼자 생각하다가 결정한 거야?”
“미진아.”
“너 뭐야? 나보고는 고민 있으면 다 말하라며.”
“미안해. 같이 고민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야. 나하고 같이 고민할까 말까를 생각했다고? 군산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응.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너 좀 웃긴다. 그래서 언제 가는데?”
“이번 주말. 토요일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알지?”
“응. 이제 이틀 남았지.”

3.
“당황스럽다. 이걸 언제 얘기하려고 지금껏 말도 없이 있었던 거야?”
“원래는 지난주에 말하려고 했는데,”
“지난주? 이번 토요일에 무려 군산으로 이사한다는 걸 지난주에 말하려고 했다고?”
“미안해.”
“넌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그래서 왔잖아.”
“그럼 뭐, 같이 가기라도 하려고?”
“안 되겠지?”
“너 지금 장난하니?”
“역시 괜히 말한 것 같다. 그냥 조용히 갈걸.”
“조용히 가면 뭐, 그냥 사라지려고 했어?”
“가서 연락하려고 했지.”
“대단하다 정말. 너는 모든 게 쉽구나.”
“미진아.”
“이름 그만 불러.”

나무의 소원

사막 한가운데서 나무가 생겨났다. 나무는 사막 아래 희미하게 남은 물을 흡수하면서 천천히 자랐다. 사막이 워낙 건조한 탓에 나무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무는 잘 견디어냈다. 몇십 년이 지나자 나무는 키도 커지고 가지도 많아지면서 제법 성인의 티가 나기 시작했다. 파란 잎과 빨간 열매를 달고 으스댈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러나 사막에는 나무 말고 다른 생명체가 없었기 때문에 나무는 늘 외로웠다. 매일 새로운 열매를 만들어도 보여줄 상대가 없었다. 나무의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래서 나무는 가끔 사막에게 말을 걸었다. 일부러 몸을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막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사막의 모습은 매일 바뀌었다. 나무가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면 사막은 늘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나무는 사막이 너무 바빠서 자신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는 사막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사막을 걷다가 나무를 발견하고는 신기해했다. 밑동을 쓰다듬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도 하면서 나무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러나 나무는 사람들의 관심이 싫었다. 나무가 원한 것은 친구였지 잠깐 스쳐 가는 관심이 아니었다. 나무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신도 사막이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마다 신에게 빌었다. 사막으로 하여금 자신을 삼키게 해달라고, 그래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래 폭풍이 불었다. 나무는 폭풍 속에서 사막과 눈을 마주쳤다. 사막은 나무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무는 두려웠지만, 좋다고 답했다. 그래서 사막은 나무를 집어삼켰다. 얼마 뒤 사람들이 다시 사막을 찾았을 때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 사막을 뒤졌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건 거친 모래뿐이었다. 나무를 그리워한 사람들은 사막 한가운데서 제사를 지냈다.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사막 곳곳에 뿌려가면서 나무를 추억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막은 점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 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사막 한가운데서 다시 나무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두 그루였다. 나무들은 사막 아래 희미하게 남은 물을 흡수하면서 천천히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