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에 생채기가 났다. 바닥을 두드리다가 생긴 일이다. 꽃잎 하나가 멍이 든 것처럼 벗겨졌다. 막대기 끝이 뾰족해서 언젠가 다칠 줄 알았다. 타일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벗겨진 살 위로 가루가 묻어 나온다. 밤에 피는 꽃은 생명이 질겨서 쉽게 죽지 않는단다. 멍이 든 상처에 볼을 댄다. 벌레가 나타나 눈앞을 빠르게 가로지른다. 타일은 범인을 알고 있다. 굳은 물감을 물에 풀고 부서진 가루를 넣는다. 어제를 기억하지 말고 내일을 창조하라. 때때로 오늘을 묻을 줄 알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잎을 그린다. 섬세하지 않으면 장인이 될 수 없다.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벌레가 다시 나타나 타일 주위를 맴돈다. 벗겨진 살 위로 생명이 돋아난다.
Category: Random
연필과 속도
연필이 부러졌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사두었는데 막상 감성이 필요한 순간 부러지고 만다. 몇 문장 쓰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불량이었거나 연필도 나이가 들어서 약해졌는가 보다. 오랫동안 꽂아만 둔 게 미안하면서도 왠지 서운하다. 종이에 남은 가루가 눈물로 보인다. 지우개를 가져다가 앞서 쓴 문장을 지웠다. 연필은 쓸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니까 내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하자.
속도는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으로, 어떤 물체의 위치 변화를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여러 번 읽어 봐도 어렵다. 문장을 통으로 외우면 좋을 텐데 내 머리는 바빠서 그럴 틈이 없다. 그래서 여기에 적어 둔다.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고 하루는 시간을 넘어 내일로 간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달린다. 여기에다가 속력 대신 ‘속도’를 쓰려면 문장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비가 오는데
창문이 고장 났다. 바람이 세게 부는데 창을 닫을 수 없어서 비가 들이친다. 책상이 젖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둔 컵에 어느새 물이 차 있다. 책을 안쪽으로 옮겨야 한다. 책장을 사야 하는데, 생각만 몇 달을 했더니 결국 고생이다. 게으름 때문이다. 창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날이 좋았기 때문이며 이제 태풍이 다 지나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을 테니 미뤄둔 나들이 지금 하시라고.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책장은 필요할 때 바로 샀어야 하고 창문이 닫히지 않으면 고쳤어야 한다. 그랬으면 지금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옮기는 게 아니라 읽고 있었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억울해서 책 옮기기를 그만둬야겠다. 연주하고 싶은 곡이 생각났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피아노 뚜껑을 연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빗소리가 들어온다. 책은 비닐을 찾으면 대강 덮어 둬야겠다. 아무래도 좋다.
우산을 버리게
슬리퍼가 제일 쓸모 있을 때는 비가 올 때야. 신발 젖을 걱정 없지, 양말도 필요 없지, 물이 튀어도 슬리퍼니까, 금방 마르는데 뭐 어때 하는 거지. 발가락 사이에 줄이 들어가는 걸 쪼리라고 하지? 그건 좀 불편했어. 바닥이 젖어서 한번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그 줄 때문에 아프더라고. 물론 시원하기는 슬리퍼에 비할 바가 아니지. 일단 발등이 훤하잖아. 비가 씻어주기도 하고.
오후에 비 소식 있다며. 나는 말이야, 가끔 우산 없이 다니거든. 무겁잖아. 번거롭기도 하고. 작고 가벼운 건 들고 다니기는 편한데 우산 구실을 못 하고 긴 건 무겁지. 무겁고 귀찮고 그래. 가방에도 안 들어가니까 계속 손에 쥐고 있어야 하고. 비? 맞는 거지 뭐. 우산도 없는데 어쩌겠어. 근데 되게 시원하다. 그렇게 안 다녀봤지? 머리 대충 묶고 티셔츠 하나 입고 나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거야. 맨발에 슬리퍼 신고, 천 쪼가리 조금 걸친 게 딱 자연인 체험이지. 그래서 가끔 뉴스에서 내일 비 온다, 곧 장마철이다, 하면 괜히 설레기도 해. 웃는 거 봐. 진짜 시원하다니까. 언젠가 너도 꼭 해봐. 시작은 어려운 법이니까 내가 같이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