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604호

몸이 무거워요. 그리고 물소리가 들려요. 원래 이렇게 깜깜한 거예요? 방금 누가 불을 켰어요. 이제 의자가 보여요. 중앙에, 방이 되게 큰데 바닥에 카펫도 있고 책장인가 선반 같은 것도 있어요. 그리고 방이 움직여요. 천천히 제자리에서 도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누가 문을 두드리는데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해요. 창문이 없어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문밖에서 무슨 소리도 들려요. 티브이 같기도 하고, 누가 싸우나 봐요.

저는 누워 있어요. 카펫이 오래됐는지 까슬까슬해요. 음악 틀어도 돼요? 바깥에서 나는 소리 듣기 싫어요. 저 요즘 무서운 음악 듣거든요. 막 소리 지르고 그런 거요. 저 별것 다 들어요. 그런데 스피커가 없어요. 방에, 오디오는 있는데 누가 스피커를 없앴어요. 음악은 틀어져요. 누가 진짜 싸우나 봐요. 방금 뭐 던지는 소리도 났어요. 머리가 아파요. 물소리도 계속 나고, 조금 추워진 것 같아요. 저 뛰어도 돼요? 신발 좀 벗고요. 아, 저 묶여있어요. 누가 다리를 묶어놨어요. 잠깐만요, 풀어 볼게요. 운동화 끈 같은데 장난처럼 대강 해놨어요.

이제 됐어요. 그런데 누가 오나 봐요. 발소리가 들려요. 가깝진 않고 멀리서 뛰어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악 소리도 들려요. 아까 싸우던 사람들이 틀었나 봐요. 클래식요. 아니, 섞여 있어요. 전자음악 같기도 하고요. 저 배고파요.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의자요? 없어졌어요. 누가 가져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누워 있어요. 그리고 카펫이 자랐어요. 풀 같은 게 계속 올라와요.

오렌지

어릴 적 꿈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커피에 대해 물으면 네 눈에선 빛이 났다. 너에게서는 항상 특유의 향이 났고 나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가끔 그 눈 속에서 나도 빛난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마셔본 일은 없지만 너를 통해 향을 알았다.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좋았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너의 머그잔을 본다.

일 년 전 카페를 정리한다고 했을 때 사실 난 예감하고 있었다. 네 눈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던 때다. 그날도 넌 새로운 삶에 대해, 제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아직 너를 보는 게 좋았지만 네 눈 속에 나는 더 이상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 내 것이기도 했던 너의 머그잔을 바라본다. 익숙한 건 겉에 남아있는 그림뿐, 모든 게 낯설다.

저녁 하늘이 유난히 붉다. 창밖 노을 따라 네 머리도 붉게 물든다. 너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에서 내가 알던 것과 다른 향이 난다. 아마 귤 재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주의 날씨는 어떠냐고 묻자 네 눈이 반짝 웃는다. 네가 입을 뗀 잔에는 옅은 오렌지가 남아 있다. 창밖은 이제 그림자도 붉게 물들었다. 나는 잠시 너를 그리워한다.

비 오는 날의 순대

마지막 출근길에 비를 맞으면 행운이 깃든다고, 모르는 번호에서 문자가 온다. 그런 소리를 할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오늘은 모른척해 준다. 이 누님의 발걸음이 가벼운 날이니까. 번호는 또 언제 바꾸었나 모르겠다. 들쭉날쭉, 네 인생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나도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만. 이게 다 비가 와서, 비 오는 날 순대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필 현금이 없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 순간의 넉살이란. 네가 웃을 때 눈이 사라진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연하지. 만난 것도 처음인데. 흰 티에 빨간 바지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빨간색은 등산객들이나 입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날도 비가 왔다. 운동화가 다 젖었다며 너는 나를 신발가게로 끌고 가더랬다. 나중에 본 그때 사진에서 나는 한 손에 튀김 봉지를 꽉 붙잡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츠는 아직 잘 있다. 덕분에 마지막 출근길에 발이 젖지 않으니 조금 고맙기는 하다. 창창한 앞날을 두고 시답잖은 생각이라니. 행운이 깃들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오늘은 네 모든 과오를 잠시 덮어주기로 한다.

희준의 레모네이드

갓 잡은 명태에서 비린내가 난다며 그 난리를 치던 그였다. 평소 쓰던 칫솔에 치약을 잔뜩 묻혀서는 장화 주변이 비늘로 번들거릴 때까지 닦고, 또 닦았다. 잊고 있던 벨 소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바로 알아야 한다며 열심히 음을 바꾸던 게 이런 의도였을까. 사람 냄새엔 관심도 없으면서 생선만 보면 그리 집착을 하더랬다. 밥을 먹은 뒤에도 양치보단 레모네이드가 편하다고, 그거면 되지 않냐고 되묻다가 웃었다. 그는 웃으면 눈이 사라진다. 시간 지나 봐, 그거 다 의미 없다. 들어도, 들어도 와닿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은 너한테서 생선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치약? 그게 다 뭐라니? 두고 봐라, 이름도 까먹을걸. 버릴 수 있을 때 버려. 쓴소리는 가끔 꿈에서도 듣지만 그래도 하나는 맞았다. 나는 네 이름을 잊었으니까. 발치에서 명태 비늘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휴대폰 액정의 낯선 너는 누구인지 모르겠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라디오를 틀었다. 방금 도착한 사연이, 여보세요? 경기도 안양시에서, 여보세요, 오늘 바깥이 소란스러워요, 무슨, 저희 집 앞에 초등학교가, 여보세요? 있거든요. 언젠가 그 앞을, 어디, 지나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이따가, 모여 있었어요. 항상 차들도 많이 다니는 거린데 그날은 한 대도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