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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문장 사건

어서 오세요. 토막 문장에게 희망을 주는 공간입니다. 기부를 하셔도 되고 가격이 맞으면 제가 사기도 합니다. 사실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지났는데 성과가 신통치 않아요. 문장이 모이는 속도도 느리고, 찾는 분들도 없고요. 그래서 이렇게 지면을 빌려 보기로 합니다. 저희 사무실은 서울 동남쪽에 있어요. 방문이 필요한 건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명함을 만들다 보니 주소가 필요했거든요. 물론 오시면 기념 책자 정도는 드려요. 작년에 출간된 ‘문장의 수난사’가 제 방에 백 권쯤 쌓여 있답니다.

오래전 누가 그래요. 토막은 완전체가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한 거 아니냐고요. 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있을 예정이지만 아직 없다면 뭐, 미래에서 왔다 쳐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여기는 예정 없이 불쑥 나온 문장을 수집하는 곳인 겁니다. 어차피 그 문장들이 언제 빛을 볼지도 모르고, 또 주인 없는 글이 워낙 많기도 하고요. 한때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문장이 다른 누군가에겐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여하튼 그래서 저는 토막을 계획되지 않은, 혹은 예정에 없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사람마다 배우는 시간이 다르듯 문장도 성장하는 시간이 다 다르니까요. 여담이지만, 사실 문장 같은 건 천 개쯤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걸요. 그러니까 저는 수많은 문장에게, 토막 문장에게 정말 희망을 주는 셈이에요. 언젠가 멋진 글이 될 수도 있다고요.

영업시간이 의미는 없지만 사무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려 있어요. 혹 방문하실 예정이면 미리 연락 주시길 바라요. 한동안 출근이 뜸했는데 하필 직원도 저 혼자거든요. 그래도 나름 잘 꾸며두어서 볼 만은 할 겁니다. 사무실에 나무가 이렇게 많다니! 분명 놀랄 테지요. (제가 커피도 좀 타거든요.) 그럼, 오늘도 문장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그럼, 길 잃은 문장이 어서 빛을 찾기를! 안 되겠어요. 마지막 부분은 다시 드릴게요. 그리고 쓰다 보니 그동안 문제가 뭐였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아요. 참, 제가 식당을 하나 봐두었는데 이따 같이 가실래요? 묻고 싶은 게 많아요.

다른 것

기다려봐. 이게 여기를 열면, 보여?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잘 봐봐. 저게 거울이거든. 나 안경 쓰고 올게. 아니, 그럼 더 보기 힘들어. 여기 눈 가까이 대볼래? 약간 왼쪽에, 반짝이는 거. 어디서 난 거야? 봤어? 신기하지 않니? 으응. 안 봤구나. 아냐, 봤어. 신기한데 난 네가 이런 걸 갖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해. 전에 터키 갔을 때 사온 거야. 거기선 행운을 비는 물건이래.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선물도 하고 그런다더라. 색깔 특이하다. 이걸 뭐라 하지, 청록이니? 터-쿼이즈라고 하는 거야. 뭐, 비슷해. 암튼, 내가 진짜 아끼는 건데 너 보여주려고 들고 온 거다. 그래, 예쁘다. 난 터키 하면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은 토스트만 생각나는데. 그때 거기? 응. 참, 총각은 잘 지낸다니? 누구? 모르는 척은. 왜, 너 한참 얘기했잖아. 어딘가 있겠지. 그래서 이제 공부는 다 한 거야? 모르겠어. 여행이나 좀 더 다닐까 싶기도 하고. 이거나 먹어봐. 너한텐 맞을 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야? 그때 비행기에서 먹은 건데, 오면서. 아, 전에 얘기한 그거구나. 응. 난 푸석해서 별로더라. 근데 나 진짜 뭐 하지? 너 그거, 내가 항상 너한테 묻던 거잖아.

을지로

“왜 모른척해요?”
“아니라니까.”
“뭐예요, 표정.”
“바빴어. 오늘 사람도 많았고.”
“나 봤잖아요. 손도 흔들었는데.”
“미진아,”
“그리고 아깐 한가하던데요.”
“너 나 관찰해?”
“제가요? 관찰은 선배가 했죠.”
“이따가 얘기하자. 일 마무리 좀 하고.”
“여기 앉아도 되죠?”
“그래. 아니, 저쪽에 앉으면 안 될까?”
“알았어요. 근데 왜요?”
“입구잖아. 추워.”

편집

할 말이 많은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게 힘들다. 그래서 차라리 숨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못다 한 이야기는 금세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를 잊는다. 이야기는 홀로 남아 세상을 여행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남아프리카에 닿았다가 큰 바다 건너 아마존에 닿았다가 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데 이야기만 남아 무얼 하느냐 묻는 사람을 본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이야기가 사람에게 말한다. 단지 형체가 없어서 죽을 수도 없을 뿐, 난 당신이 부러워요. 사람은 처음으로 이야기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은 기억과 닮았다. 애를 쓰면 손에 잡힐 듯하고 고개를 돌리면 금세 스쳐간다. 기억은 종종 너무 쉽게 왜곡되어 실제와의 연결을 잃는다. 나는 가끔 존재한 적 없는 일을 떠올린다.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모두 펼쳐두고 싶지만 기억은, 그저 흐를 뿐, 남은 것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시간은 기억을 편집하고 나는 시간을 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