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꿈으로 지은 배

나를 왜 뽑았어요? 흰 도화지 같아서. 잘 써지고 잘 지워지는 사람을 원했거든. 면허증은 가져왔지? 네, 여기. 사진 본인 맞아? 몇 년 전이긴 한데. 앳되구나. 어디 보자, 네가 몰 배는 저기 있다. 겉에 뭐가 적혔던 거예요? 녹이 많이 슬었는데. 아, 전 주인이 꿈을 좋아해서. 꿈이오? 응. 저 배 이름이 꿈이었어. 서울에 사는 양반이었는데 뭐라더라, 하여간 글 쓴다고 연락이 끊겼어. 배를 두고요? 맡겼지. 내가 잠시 맡아주는 거야. 제가 운전하다가 그분이 다시 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제 전 주인인데, 뭐 어때. 배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있겠지. 여기 있는 배, 전부 사연 있는 거야. 배 모는 사람들은 사연도 몰고 다니지. 그러니까 뱃사람, 하면 말 많다고들 하잖아. 저도 이제 뱃사람이에요? 봐야지, 뱃사람인가 아닌가. 이삼일 되면 딱 보여. 아저씨는 언제 뱃사람이 됐어요? 난 육지인이야. 이제 바다는 가지 않아. 그만둔 거예요? 육지인이라니까. 그래서 널 뽑았잖아. 아, 네. 그리고 말이야, 아저씨 아니다. 그럼 뭐라 불러요? 글쎄, 뭐 없으면 이름 부르든가. 제가 돌아와도 여기 계실 거죠? 응. 집이니까. 참, 전 주인이 이 말 전해주라 했어. 허물어져 가는 배에도 반짝임은 있다고.

예찬

창문을 연다. 적적함을 깨고 싶다. 건너편 옥상에서 누군가 빨래를 넌다. 음악을 튼다. 책을 펴고 테이블을 당긴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오려나, 공기가 눅눅하다. 빨랫줄에 걸린 셔츠가 춤을 춘다. 옥상에 한 사람이 더 올라온다. 고양이도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허공을 본다. 첼로와 피아노는 환상의 짝이구나. 책을 덮어야겠다. 턱을 괴고 노래를 부른다. 테이블을 두드린다. 요즘 고민이 있어. 머리가 비어가는 게 느껴져. 응, 반가운 소식이다. 삶이 평온할 땐 생각할 필요가 없지.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었어. 여행의 맛도, 배움도 잊었어. 넌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두비두밥, 그거 다 위안이다. 아니, 그렇진 않고. 올 시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 그냥 다 관뒀어. 강박증이니? 두비두-밥, 언젠가 마주칠지 모른다. 빠질지도 모른다. 자극을 받으려면 마음이 불안해야 해. 잘 지내는구나? 뭔가 해야겠다 생각이 들면 놓치지 마. 때가 지나면 의미가 흩어진다. 그리고 있지, 날 원하는 곳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봄이 오고

“난 어제 일은 생각 안 해. 내일 일어날 일도 궁금하지 않아. 거울 속 나도 매번 다르잖아. 지금 뭐 해? 책 봐. 그럼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해. 책을 볼 땐 누구의 방해도 허락해선 안 돼. 지금 뭐 해? 생각해. 아름다운 시간이구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떠올리도록 해. 지금 뭐 해? 자고 있지. 그럼 잘 자. 꿈은 꾸지 않기를 바라. 내게 중요한 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야. 나머진 흘러가게 둬.”

봄을 조용히 보내면 그해 겨울까지 평온할 수 있다. 일 년을 선물로 받는 셈인데, 확률이 꽤 높다. 가끔 그리움은 들겠지. 그건 거부할 수 없는 동물적 감각이니까. 그리고 자유. 너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말이 있을까. 금방 떠나겠지만 또 어딘가 있겠지. 가끔 생각할게. 언제나 살아있기를.

환상 속에서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잘 잊는다. 가끔 불러야 할 땐 눈을 보거나 몸을 쳤는데 이젠 익숙해서 그냥 이름을 묻는다.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자주 놓치기도 한다. 둘이 있을 땐 되묻는데 여럿일 땐 나만 못 들었나 싶어 그냥 웃고 만다. 그래서 셋 이상의 자리엔 끼지 않으려 한다. 말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때를 놓치면 의미가 사라지니 결국 말도 안 하게 된다. 그래도 좋다, 싫다, 고맙다, 미안하단 말은 제때 하려고 한다.

눈은 사람의 미래를 본다고 했다. 귀는 과거를 듣고 입은 현재를 말하니 들은 만큼 말하고 또 그만큼 보는가 보다. 요 며칠 눈앞이 흐리다. 책을 보다가 고개를 자주 드는데 참고 보다 보면 금세 어지러워진다. 눈을 비비면 잘 보일 때도 있고 더 흐려지기도 한다. 오늘을 살다 보니 생각이 짧아지고 내일을 잊자 하니 꿈을 잊어간다. 하고 싶은 건 몰라도 할 수 있는 건 많고, 시간도 많다. 느리게 살자 했더니 모든 게 느려 보인다. 오늘도 안녕,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