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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를 신는 삶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의 성격에 관해 생각해봤다. 우선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을 좋아할 것 같다. 가끔 맨발로 바닥을 디딜 때면 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기분을 느꼈을지 모른다. 슬리퍼를 신다가 보면 수시로 벗어둘 공간도 필요한 법인데 슬리퍼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이미 그런 공간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현관 앞, 화장실 앞, 침대 옆, 또는 티브이 앞에 앉아서 어딘가 발을 올려둘 때도 항상 슬리퍼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은 청소를 자주 하기보다 한 번 닦고 정리한 다음에 오래 유지하는 걸 선호할 것이다. 잘 어지르지 않는 차분함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 사람이 게으름을 즐기면서도 그 게으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생활 공간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한 번 정리해두고 건드리지 않는 건 게으른 자만의 능력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슬리퍼를 신기 시작한 이유가 단지 몸에 먼지가 묻는 게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닥에 먼지가 있을지 모르니 발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신었을 거란 이야기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지낸다는 것은 관리해야 할 생활용품이 하나 늘어난다는 뜻이다. 매일같이 신어야 하니 금세 더러워질 것이고, 그러면 주기적으로 닦거나 빨아줘야 하는데 언젠가는 신발처럼 해지고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한 번씩은 새로 살 필요도 생긴다. 그런데도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다면 그건 분명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탓일 것이다. 혹은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균형 잡는 것에 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즐기는 게으름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

입장 도우미

이름하고 태어난 해부터 적어주세요. 그 옆에 나이는 비워 두셔도 됩니다. 성별도요. 처음이시죠? 제가 웬만하면 사람 얼굴을 잊지 않는데 서영님은 확실히 처음 뵙는 것 같아서요. 의자 불편하시면 미리 말씀 주세요. 시작하려면 아직 오 분쯤 남았으니까 이리저리 뒤척여 보시고요. 검사 도중에 불편함을 느끼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돼서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네, 그렇게. 몸을 좀 크게 움직여보는 게 좋습니다. 팔걸이는 어때요? 딱딱하다거나 높이가 안 맞는다거나. 아, 물론 걸쳐두시지 않아도 됩니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아서 그대로 계시면 가장 좋아요. 잠시만요. 식사하신 지는 좀 된 거죠? 한 시간? 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거 우선 받으시고요. 뜯어보세요. 위쪽, 점선 있는 곳 보이시죠. 그리고 물도. 자, 이제 시계를 보시다가 3시 정각이 되면 그 포를 입에 털어 넣고 삼킨 다음에 물을 세 모금 드시는 겁니다. 포가 먼저, 물이 나중이에요. 이제 30초 남았어요. 의자는 괜찮으시죠? 좋습니다. 물까지 다 드시고 나면 잠이 올 거예요. 그럼 제가 대화를 시도할 겁니다. 춥지는 않죠? 혹시 모르니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이겠습니다. 준비되셨나요? 자, 포를 입에 넣고. 삼키세요. 그리고 물을 세 모금, 그렇죠. 한 모금 더. 잘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계세요. 눈은 감으셔도 됩니다. 제가 밝기를 낮출 거예요. 천천히 숨 쉬시고. 어때요?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좋습니다. 방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요. 서영님은 잠이 들기 시작합니다.

경득의 시간

왼쪽으로 조금씩 가주세요. 신발, 발 조심하시고요. 오늘따라 많이들 오셔서 조금 난감한데, 그래도 진행해볼게요. 허리 펴주시고 팔 높이, 쭉 펴주세요. 두 번째 줄! 높이, 그렇지. 제가 얘기했죠. 팔다리 길쭉한 거랑은 상관없다고. 자신 있게 쭉, 팔에 힘을 조금 주면 형태가 나아져요. 좋아요. 두 번째 줄! 옆 사람 말고 저를 보세요. 팔에 힘, 그렇지. 반대편 팔은 편하게 두세요. 좋아요. 이제 내리고. 숨을 크게 들이 쉬어보세요. 잠깐 참았다가, 이제 내쉬고.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볼까요. 서로 공간이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오늘만 참아 봅시다. 다시 허리 펴주시고요. 이번엔 목을 풀어 볼게요. 고개 숙이고 왼쪽으로, 천천히 왼쪽으로, 점점 고개 젖히시고 오른쪽으로, 좋아요, 천천히,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리세요, 그렇지, 다시 고개 숙이고. 머리 긴 분들은 묶는 게 좋겠어요. 사무실에 끈이 있었는데, 혹시 지금 더워요? 더우신 분? 기다려 보세요. 아까 두 번째 줄, 경득님 맞죠? 저랑 같이 가요. 다른 분들은 잠깐 음악 틀어둘 테니 자유롭게 몸 풀고 계세요. 혹시 듣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다. 제가 알아서 틀어둘게요. 목마르신 분은 냉장고에 물 있으니 드시고요. 경득님? 이리로.

악어를 보았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악어를 보았다. 악어는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던 악어가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악어는 몸집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다 자랐을 때의 크기를 몰라서 ‘몸집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왠지 성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악어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손도 흔들고 발도 구르면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악어는 허공을 보면서 눈만 깜박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문이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리모컨으로 보이는 작은 기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 리모컨으로 악어를 조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악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수인, 남자는 악어를 그렇게 불렀다. 수인, 일어나. 가자. 남자는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버튼을 누르는 듯했다. 수인, 그만 자고 가자. 그때 갑자기 악어가 움직였다. 악어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봤다. 악어의 눈은 이제 깜박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무서워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악어는 한참 동안 나를 보더니, 눈을 다시 깜박이면서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악어의 뒷모습을 보니 꼬리가 상당히 짧아 보였다. 남자는 다가오는 악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나는 남자의 손이 악어의 이빨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악어는 남자를 지나 그가 나왔던 곳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그 남자도 조금 무서워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해. 윤정해요. 남자는 웃으면서 내게 악어 좋아하니, 하고 묻더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면서 명함을 건네줬다. 명함에는 아까 본 악어를 꼭 닮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