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나무의 소원

사막 한가운데서 나무가 생겨났다. 나무는 사막 아래 희미하게 남은 물을 흡수하면서 천천히 자랐다. 사막이 워낙 건조한 탓에 나무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무는 잘 견디어냈다. 몇십 년이 지나자 나무는 키도 커지고 가지도 많아지면서 제법 성인의 티가 나기 시작했다. 파란 잎과 빨간 열매를 달고 으스댈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러나 사막에는 나무 말고 다른 생명체가 없었기 때문에 나무는 늘 외로웠다. 매일 새로운 열매를 만들어도 보여줄 상대가 없었다. 나무의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래서 나무는 가끔 사막에게 말을 걸었다. 일부러 몸을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막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사막의 모습은 매일 바뀌었다. 나무가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면 사막은 늘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나무는 사막이 너무 바빠서 자신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는 사막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사막을 걷다가 나무를 발견하고는 신기해했다. 밑동을 쓰다듬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도 하면서 나무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러나 나무는 사람들의 관심이 싫었다. 나무가 원한 것은 친구였지 잠깐 스쳐 가는 관심이 아니었다. 나무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신도 사막이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마다 신에게 빌었다. 사막으로 하여금 자신을 삼키게 해달라고, 그래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래 폭풍이 불었다. 나무는 폭풍 속에서 사막과 눈을 마주쳤다. 사막은 나무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무는 두려웠지만, 좋다고 답했다. 그래서 사막은 나무를 집어삼켰다. 얼마 뒤 사람들이 다시 사막을 찾았을 때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 사막을 뒤졌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건 거친 모래뿐이었다. 나무를 그리워한 사람들은 사막 한가운데서 제사를 지냈다.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사막 곳곳에 뿌려가면서 나무를 추억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막은 점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 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사막 한가운데서 다시 나무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두 그루였다. 나무들은 사막 아래 희미하게 남은 물을 흡수하면서 천천히 자랐다.

나와 상관없는 일

거리에서 보는 건물은 멋있고 좋은데 막상 안에 들어가면 별 느낌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멋진 건물에 있다는 걸 인지하고 싶어도 아까 본 외관을 상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내가 몇 층, 어느 자리에 무슨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내가 있는 곳을 바깥에서 보면 어떤 모습인지 구경하고 싶은데 세상 규칙은 그런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 바람이 지나친 걸까요. 가끔 이렇게 하면 좋겠다 싶은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게 생긴 것과도 비슷한데, 부서진 꿈 폐기장에서 재활용 물품 하나를 찾은 기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막상 실행에 옮기면 흥미가 떨어집니다.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면 재미있습니다. 세상은 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만 흘러갈까요. 나는 어제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끔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서 이건 절대 잊지 말아야지, 해도 금세 잊고 마는 게 이 머리의 특징입니다. 오히려 쉽게 지나가는 것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세상은 늘 나와 상관없이 돌아갔는데 나는 뭘 그렇게 기대하며 살았을까요. 사람들에게서 들을 땐 재미있는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나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싶은데 그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봅니다. 그리고 가끔 집에 도착한 택배를 보면서는 이걸 뜯을까 말까, 지금 열어볼까 내일 열어볼까, 며칠 더 놔둬 볼까 고민합니다. 포장된 물건을 보면 뜯고 싶지만, 막상 뜯긴 포장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나는 종종 궁금합니다. 왜 건물 안에서는 바깥 생김새를 볼 수 없으며 왜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면 흥미를 잃게 되는지, 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금세 잊으면서도 몸서리치게 싫은 순간은 머리에 각인되고 마는지, 왜 사람들이 재미있게 한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는지, 왜 나는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직도 뭔가를 기대하는지. 왜 다 알면서 모른 척 속고만 사는지. 나는 왜 여기에 남아있으며, 여기에서 난 무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내게 묻는 사람도 없거니와 내 물음에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알고 싶은 게 많은데 다들 이미 아는 내용이라 흥미가 없는 걸까요.

핑크 베이지

꿈을 꾸면 주로 어떤 동네가 나와요. 블록-블록에 큰길로 도는 골목에,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 길도 다 알고 단골집도 있고 그래요. 꿈을 자주 꾸는 편이거든요. 언젠가 그 동네에 살았나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어요. 막 도시까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시골도 아니고요. 신기하죠? 몸에 뭐가 들어오거나 달려들어서 싸우는 꿈도 자주 꿔요. 생각이 많으면 꿈도 자주 꾼다면서요. 저는 잡생각도 없는데 왜 그럴까요.

이 꿈은 아까워서 나만 알고 있었는데 일주일 넘었으니 얘기해 볼게요. 어느 동산 같은 곳에 혼자 올라갔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뭐가 나타났어요. 시계태엽같이 복잡하고 큰 거였는데 안으로 길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마어마했어요. 너무 멋있어서 사진 찍어다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그날 혹시나 해서 사본 연금복권은 전부 꽝이었어요. 꿈은 정말 비범했는데 말이죠. 꼭 시계태엽처럼 생겼는데 시계는 아닌, 그게 뭐였을까요. 무슨 공장의 큰 기계 같기도 했고. 아무튼 그런 게 하늘에 있었어요. 핑크 베이지 같은 느낌으로. 진짜 엄청나게 예뻤어요. 신기하지 않아요? 잘 될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생각을 피하는 방법

“기억이 안 나.”
“바로 어제 했던 얘기잖아. 어디 적어 두기라도 하던지.”
“미안. 보면 또 생각날까 봐.”
“생각 좀 나면 안 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아프다.”
“너는 내가 생각나는 게 두려워?”
“그런 건 아닌데.”
“이해할 수 없어. 요즘도 매일 지우는 거야?”
“응. 밤마다.”
“부지런도 하다. 어쩌다 안 지우면 어떻게 돼?”
“그럼 뭐. 다음 날 벌 받는 거지. 종일 생각나고 괴롭고.”
“너 그거,”
“알아. 병인 거.”
“뭐래. 이상한 소리 말고 밥이나 먹으러 와. 고등어찜이랑 부침개 해놨어.”
“배 안 고프다니까.”
“지금 오는 게 좋을걸. 또 후회하지 말고.”
“씻어야 돼.”
“삼십 분이면 되지? 문 열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