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무명 다비드

창 한쪽 구석에서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반대편 구석으로 사라진다. 방이 해를 삼키는 시간이다. 내가 누운 자리에서는 앞집 옥상이 보인다. 오늘은 모자를 쓴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남자는 머리가 덥수룩해서 얼핏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 평소 같으면 방정맞게 움직였을 빨래가 오늘은 곱게 매달려 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날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옥상에 올라온다. 하지만 건너편 집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방 한쪽 구석에서 조각상의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다비드.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었지만, 생김새가 영 달라서 무명으로 남겨 두었다. 이름 없는 조각상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옷을 반쯤 걸치고 있다. 나는 포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글자를 그리다가 선을 하나 잘못 그어서 이를 어쩌나 싶던 중 그냥 누워버렸다. 어느 책에선가 본 문구를 쓰고 싶었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포스터는 무명 다비드 뒤에 붙일 예정이었다. 그래서 다비드를 볼 때마다 이 글을 발견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조각에 이름이 없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때때로 생각하는 것도 소음이 된다. 그러면 나는 불안해져서 돌아누웠다가 앉았다가 한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보낸, 오늘은, 어제 삶을 마감한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 입니다. 나는 내일을 바라지 않는데 누군가는 내일을 그토록 원하는구나. 내가 오늘을 아무렇게나 보내면 그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게 될까. 만일 나에게 내일이 없다면 그 하루는 누가 갖게 될까. 포스터 작업을 마저 해야겠다. 잘못 그린 선은 원래 의도였던 것처럼 강조해봐야겠다.

배고픔에 관하여

사람의 배고픔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냉장고의 존재다. 사람은 기계와 같은 움직임으로 침대를 벗어나 슬리퍼를 찾아 신는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걷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어두울 때면 두 팔을 크게 저어가면서 냉장고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익숙한 문고리에 손이 닿으면, 그대로 쥐고 당긴다. 이제 냉장고에서는 빛이 쏟아진다. 각종 음료와 물, 아무튼 마실 것들이 밝은 빛 아래에서 사람을 반긴다. 그리고 사람은 목을 축인다. 그리고 목을 축인다. 그리고 계속 축이다가 조금 살만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사람은 탄수화물을 찾는다. 어떤 날은 빵, 또 어떤 날은 밥, 아침부터 밥을 먹는 날도 있다, 언제는 초콜릿, 혹은 어제 먹고 남은 피자, 그날그날 다양한 음식이 사람의 선택을 기다린다. 가끔 운이 좋으면 데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준비돼있기도 하다. 엘렌 코트는 아침에 빵 대신 시를 먹으라고 했는데, 뭐 이런 생각이 들면 목을 축인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시기에 드는 생각인데 실제로 경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의 육체가 배고픔을 잊으면 이제 정신이 배가 고플 차례다. 정신의 배고픔은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그리고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면 그 부분까지, 몸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모든 유기 회로로 퍼진다. 사람의 정신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새롭다는 것은 어제와 다른 것, 최고의 것, 더 끝내주는 것, 그리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흥분감을 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정신은 그런 새로움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육체가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해가 뜨기 전부터 떠나 있다가 점심이 될 때쯤 돌아오거나 해가 저물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돌아온다. 가끔 너무 멀리 간 탓에 며칠 동안 소식이 없기도 하다. 이럴 때 사람은 정신이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같은 생각을 하다가 불면증에 빠지곤 한다. 사람은 그의 앞길이 맑고 평온하기만을 바란다. 별것 아니더라도 오늘 일은 오늘 모두 마무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매일 밤 이름 없는 신에게 기도를 바친다. 내일은 온화한 하루를 맞게 해주세요. 부디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게 해주세요. 사람은 늘 배가 고파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공허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잠시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 온다. 사람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어딘가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천천히 잠이 든다.

기다림

나는 입국장 의자에 앉아 유리 벽 너머를 본다.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에게 달려간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누군가는 묵묵히 듣는다. 서로 끌어안고 우는 사람도 있다.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와 비슷하게 유리 벽 너머를 본다. 사람들이 서로 재회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오늘은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마주칠 예정이 없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나는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떠난다. 어딘가로 떠나는 행위는 정상적인 한 주를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새로운 곳에 머물 때마다 다른 어딘가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짐을 가볍게 꾸린다. 나는 매일 해가 지면 그날의 묵은 뉴스를 본다. 가끔 머무는 곳의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매일 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찾는다.

나는 내 삶을 지배하는 여러 규칙을 생각한다. 어떤 규칙은 내 하루를 잘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나는 잃고 싶지 않았으나 잃어버린 삶의 모습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그 삶에 어울리지 않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한다. 나는 갖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는 넘치게 소유해버린 많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매일 많은 것이 나를 떠나지만 그만큼 새로운 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빈자리를 모르고 산다. 나는 규칙에서 멀어지고 싶다.

토마토와 소년

냉장고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찬장을 열고 잔을 세어 본다. 몇 명이라고 했지? 대답이 없다. 남자는 찬장 문을 닫고 테이블로 다가가 앉는다. 어젯밤에 분명 여기 두었는데 와인이 보이지 않는다. 저 그림, 마음에 들어요. 선생님이 그린 거죠? 글쎄. 워낙 작품이 많아서 나도 잘. 남자는 냉장고를 열고 토마토가 들어 있는 봉지를 꺼낸다. 접시 어디에 뒀어? 말이 없다. 남자는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문다. 바닥에 물 떨어지면 안 돼. 뭐라도 받치고 먹어. 봉지 있잖아. 아니면 손이라도. 토마토는, 냉장고에서 막 꺼냈는데도 불구하고 시원한 맛이 없다. 너도 과일 좋아하는구나. 네. 하지만 먹고 싶을 때만 먹어요. 냉장고 아직 되는 거지? 아직 말이 없다. 선생님은 어쩌다가 화가가 됐어요? 기억나지 않아. 아까 뭐가 마음에 든다고? 남자는 벽에 걸린 그림 중 하나를 가리킨다. 저는 이게 제일 좋아요. 멋있어요. 너 옛날 사람들이 초능력을 믿었다는 거 아니? 저는 지금도 믿는걸요. 남자가 뒤로 돌아선다. 선생님은 그림이 왜 좋았어요? 글쎄. 나는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