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Random

물고기 아저씨

1.
잠들었다면 미안하다. 그저 목소리나 들을까 했지. 여기는 냄새가 지독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아직 연기가 나는 곳도 있어. 이럴 때 네가 있으면 좋을 텐데. 곧 사람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나는 괜찮아. 마실 건 조금 남아 있어.

2.
저 물고기는 언제부터 여기에 살았어요? 밥은 뭐 먹고살아요? 어릴 때 책에서 봤는데 옛날에는 사람도 물고기였대요. 바다에서 올라왔다던데, 아가미랑 지느러미도 있고 몸에 비늘도 있었대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빠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누가 그런 소릴 하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책을 보여줬더니 순 엉터리래요.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한 거라고, 엉덩이에 꼬리도 달려 있었다던데요. 꼬리라니. 좀 징그럽죠. 엄마는 또 뭐라는 줄 알아요? 사람은 신이 만든 거래요. 처음에 빛이랑 어둠만 있었는데 땅이 생기고 나무랑 동물도 생기고, 그러다가 마지막 날 사람이 나온 거래요. 그리고 이걸 다 신이 만들었대요. 그래서 제가 찰흙으로 인형 만드는 거랑 비슷한 거냐고 했더니 그거랑은 또 다르다고 했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물고기도 싫고 원숭이도 싫고, 누가 만들었다는 건 더 싫어요. 게다가 신이 한두 명도 아니라면서요. 학교에서 선생님은 또 이렇게 얘기했어요.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신은 그들 자신이 만든 거라고. 말 되게 어렵죠. 저도 처음 들을 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통째로 외웠다니까요. 사실 여기 올 때마다 그 생각 했어요. 물고기가 보이니까요. 원래 없을 땐 모르다가도 있으면 생각나고 집착도 하고 그런 거라면서요. 어른들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요? 그런데 아저씨는 왜 밥을 안 먹어요? 저는 배가 고프면 움직이지도 못해요. 아마 여기에 오지도 못할걸요. 쟤들도 굶기는 건 아니죠? 물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아저씨 저 물고기한테 과자 줘도 돼요? 아니면 아저씨한테 좀 나눠 줄까요? 아저씨는 언제 또 와요?

여기 물이 있어요

모자를 쓴 여자가 계단을 오른다. 진동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 아파트에는 부서진 잔해만 남아 공간을 채운다. 여자는 옥상에 올라 건너편 건물을 본다. 아직 파란 칠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물을 맞고 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호스를 들고 이리저리 물을 뿌리면서 한 번씩 고함을 친다.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다. 이리 와요, 여기 물이 있어요. 여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당신들은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를 부를 수 있죠. 여자는 아파트 일 층 입구에서 홀로 빛나는 동상을 내려다본다. 주민 자치를 기념한다고 세운 동상은 운이 좋게도 폭발을 피해 갔다. 여자는 세계가 저 혼자 싸움을 벌이다가 기어이 무너지고 만 것으로 생각한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파트 옥상을 보고 웃는다. 이리 와요, 여기는 이제 비가 오지 않아요. 우리한테 물이 있어요.

청년의 노래

걷는 사람은 단순하게 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무심히 흘러가는 것의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그동안 배우려고 했던 것과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얻을 수 없던 것의 차이를 탐구한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오늘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매일 무엇으로부터 살아남고 있는지, 그리고 어제와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극복해낼 용기가 없다. 걷는 사람은 자신이 더는 청년이 아니란 사실을 안다. 이제 기대와 희망 대신 옳고 그름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지보다 어떻게 해야 미움을 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그의 마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걷는 사람은 제 몸을 살펴본다. 마치 동물이 털을 고르듯이 몸 구석구석을 빗어낸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는다. 그는 스스로가 낯설다.

카드의 위로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7년 전 어느 식당에서 세진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 직원이 다가와 세진을 진정시켜야 했고, 나는 테이블에 남겨진 음식을 보다가 식욕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세진은 자신을 달래주던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나 잠시만, 하고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몇 분이 지나서야 돌아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있다가 나 할 말이 있어,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세진을 밀쳐내고 가방과 짐을 챙겨서 거리로 나섰다. 세진은 뒤따라 나오면서 어디 가, 내 말 좀 들어봐, 하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꽤 컸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세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바로 옆에 보이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고, 메뉴판에서 제일 싼 안줏거리와 버드와이저 두 병을 주문했다. 너 내 카드 봤어? 세진은 가방을 뒤지다가 고개를 저었는데 나도 주머니와 지갑을 살피다가 아까 식당에 두고 온 거 아닐까, 아냐 카드는 꺼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집에 있는 거 아니겠지, 너 집 여기서 얼마 안 멀잖아, 그래서 다녀오라는 말이니, 하면서 카드의 행방에 대해 오 분여를 넘게 추측했다. 그러던 중 버드와이저가 나왔고, 그 바람에 우리는 카드의 존재를 빠르게 잊어버렸다. 한참 뒤에 세진은 잠긴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안주로 나온 올리브 절임에 집중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지 뭐, 괜찮아, 하고 건배를 제의했고, 그제야 세진도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식당을 나오면서 세진이 아까 했던 말 있잖아, 하면서 복습을 시켜준 덕분에 그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얼마나 그를 무심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게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