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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문자

“우울한 이야기는 글자로 치면 기분이 이상해요. 말로 하면 공기 속에서 대충 사라지는 것 같은데 글자로 남기면 뭔가, 어떤 느낌인지 아시죠. 난 그렇게까지 그런 건 아닌데 글자로 치면 되게 그런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
“문자로 적었을 때 더 확실하게 각인되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그런 것도 좋아요.”
“글자를 치면 10초 뒤에 사라지는 메신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괜찮은데.”
“하지만 문자의 장점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도 말로 하면 공기에 녹아서 없어지다가 돌아오다가 해요. 그런데 적어 놓으면 그 자리에 있어요.
“좋은 이야기는 항상 좋게 남아 있는데 안 좋은 이야기는 오래 고통받을 수도 있고.”
“적어놓고 잠그고 바닷속에 던져 놓아요.”
“둥둥.”
“아, 50킬로짜리 추를 넣을 거예요.”

협소한 관계

“너랑 이야기하면 늘 재미있어.”
“나도 그래. 그리고 이제 확실히 친구를 사귀기 힘든 때가 되었음을 매일 느낀다.”
“친구 콤플렉스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결국 문제도 답도 내 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
“그렇구나. 난 그런 고민은 전혀 안 했는데. 여전히 아무도 안 만난다.”
“결혼해서 더 그런 걸까. 그런데 너는 혼자였어도 그냥 조용히 잘 살았을 것 같아.”
“원래 박혀 있는 거 좋아하니까 문제는 안 됐겠지. 결혼한 덕분에 그 협소한 인간관계의 본능적인 것들도 자동으로 해결되긴 했지만.”
“그래. 절친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그 오묘함.”
“그래도 혼자 있을 시간은 필요해.”

벌 받는 중

1.
“저 다른 번호로 들어왔는데 또 정지됐어요.”
“인간아, 왜 가만히 놔두지를 못해요.”
“전에 1주쯤 갔으니 이번에는 한 2주일 가려나요.”
“그러다가 영구 정지될라. 그냥 놔둬요, 좀.”
“그래도 사람들 괴롭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다른 계정이라도 만들어 볼까.”
“뭘 얼마나 괴롭혔다고 난리야.”
“아, 탈퇴도 막혔어요.”

2.
“방금 찾아봤는데, 영구 정지를 당해도 다시 가입할 수는 있대요. 아예 계정을 지워버리면 45일 뒤에 개인정보가 폐기돼서 가능해진다고.”
“그걸 찾고 있냐. 탈퇴 안 하면 되잖아요.”
“왠지 겁나서요. 아니 근데 탈퇴 좀 하면 어때서 이렇게 빡빡하게 굴까요.”
“사기꾼 잡나 보지. ○○이라던가 △△라던가.”

집, 돈, 차

1.
“지난 주말에 운전하다가 연신내, 구파발을 지나갔는데 동네 몰라보게 좋아졌더라. 성모병원도 있던데.”
“그래도 난 갈 때마다 별로야. 왠지 모르게 늘.”
“그래. 역시 사람은 비가 새더라도 강남에 있어야 해.”
“뭐 나도 그런 생각이긴 하다만.”
“우리 동네도 몇 년 사니까 지겨워져서 옮기고 싶은데, 갈 곳이 없어. 집값도 부담스럽고.”
“요즘 특히 그렇지.”
“정말 생각할 구멍도 없다. 아니면 살다 보니 내 눈이 높아졌거나.”
“나는 지금 집 자체가 너무 낡아서 어딜 가도 만족할 것 같다만.”
“그렇겠지. 대만족하겠지.”

2.
“언젠가 차 바꾸게 되면 나도 자동차 동호회나 한번 들어봐야겠어.”
“차는 그냥 마음먹으면 사는 거 아니냐.”
“모르겠어. 돈 쓸 곳도 마땅히 없고 해서 그냥 모아두기는 하는데, 가끔 생각하면 왜 모으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 같아.”
“막 쓰는 것보다야 낫겠지. 모으는 이유야 만들면 되지만, 한번 쓰고 나면 다시 모으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딘가 뒤처진다는 느낌도 드니까.”
“그런 생각도 있는가 보다. 쓰고 난 뒤의 모습이 두려워서.”
“그래, 뭐. 앞날 걱정도 하고 대비도 해야 진화된 인간 아니겠니.”
“하지만 싸면서 멋지고 좋은 차라면 얘기는 다르지 않을까. 그런 차는 없겠지만.”
“싸고 멋지고 좋은 차. 있긴 있는데 사망 직전이더라.”

3.
“최근에 제일 갖고 싶었던 차는 머스탱인데.”
“머스탱, 미국 차. 테슬라, 미국 차.”
“하지만 연비가 너무,”
“미국 차가 좀 그렇더라.”
“무식하고.”
“테슬라조차.”
“하지만 미국 차의 키워드는 자유잖아. 실용은 버리더라도 자유.”
“테슬라는 구독도 해야 하고, 주행 정보 같은 것들을 다 본사로 보낸다더라고. 자유랑은 정반대야. 중고 매매도 본사 통해서만 할 수 있다고 하고.”
“자율주행 데이터 때문일까. 그게 정책인가 보구나.”
“응. 이해는 간다만, 미국 내에서는 구매가 아니라 대여쯤이라고 비난도 하더라.”
“일시불 구독 경제 같구나.”
“아마 인터넷이 안 됐다면 차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