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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보니

키가 140이 되기 전까지는 그냥 살았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게 재미있었을 때다.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기분이 좋으면 크게 웃고 싫으면 떼쓰고 소리도 지르고 그랬을 거다.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때가 많아서 집에서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도 뭘 하든 재미있어서 밖에 나가는 것쯤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10대를 보내면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고 뭘 해도 다 잘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이루어져 있을 테니 나이만 들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어른들이 부러웠다.

20대를 살면서 나는 예상대로 뭐든 다 잘한다는 걸 알았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서 한두 가지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특별한 존재는 재능을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꼭 필요할 때 쓰려고 미뤄두기도 했다. 게으름도 나름의 전략이었다. 곧 많은 것이 이루어질 테니 마음의 준비만 하자고 했다. 내 시간은 여전히 느렸지만 이제 익숙해서 괜찮았다. 그리고 30대가 되자 꿈이 하나씩 부서졌다. 나는 상상하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했던 건 누구나 할 줄 아는 것들이었고, 나는 종종 일을 쉽게 망쳤다.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내 머리에서는 매일 넘어지고 망가진 것들이 남아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하고 싶은 것들은 하나씩 ‘그때’ 하고 싶었던 것으로 바뀌어 갔다.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지,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결말을 알고 싶지만 시간은 느리기만 하다. 노인이 되고 머리가 하얗게 세면 좀 더 알게 될지 모르겠다. 어서 나이가 많이 들면 좋겠다.

바쁘게 해주세요

집에 조용히 있으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납니다. 생각은 여러 가지일 때도 있고 좁은 범위에서 빙빙 돌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니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안 봐도 뻔히 아는 것을 확인하려고 찾다 보면 답답하고 조바심도 나고 그런 거라고요. 그런데 저는 욕심나는 것이 없습니다. 딱히 찾는 것도 없고요. 저보다 인생 선배인 분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을 해줍니다. ‘직관으로 살아라. 어른들처럼.’ 오랜만에 듣는 단어라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또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세상을 보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걸까요. 그런 삶이 가능한가요?

조용히 쉬다 보면 한 번씩 회사에 가고 싶습니다. 회사에 있으면 집에 가고 싶은데 집에 오면 일이라도 했으면 하는 겁니다. 바쁘면 생각을 안 하게 되거든요. 가끔 다 그만두고 쉬는 상상도 합니다만, 회사를 그만두면 저는 빠르게 미치고 말 겁니다. 차라리 생각하기를 그만둬야 합니다. 아주 바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배고픔과 졸림만 느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만 해도 조바심이 납니다. 한번 든 생각을 없애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는 날 집에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곳은 너무나 평온해서 숨이 막힙니다.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서 월요일이 오면 좋겠습니다.

빨랫감

결국 다시 잠드는 데 실패했어요. 대신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기로 했습니다. 한참 먼지를 닦고 자리에 앉았는데 손톱이 자랐는지 건반에 손이 딱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치다가 손톱을 깎았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청소도 하고 손톱도 깎고 피아노에게 고맙군요. 다시 자리에 앉아 하농을 쳤습니다. 역시 재미없습니다. 이어서 쿨라우의 소나티네를 쳤습니다. 피아노를 사고 제일 많이 친 곡인데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봐가면서 더듬더듬 쳤습니다. 시간이 금방 갑니다. 어두울 때 시작했는데 집이 밝아졌습니다. 피아노를 닫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우유에 꿀을 타서 마십니다. 오랫동안 반복했더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가끔 낮에 우유를 마시면서도 뭔가 새로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환기가 필요할 때 우유를 사 먹기도 합니다. 카카오톡을 괜히 살린 것 같습니다. 이번엔 꼭 버텨보고 싶은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말도 걸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피해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자꾸 미안하고 두려운 감정이 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알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술이 시작된 곳

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예요. 대학생 때는 그냥 멋모르고 먹었고, 회사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맥주를, 그 다섯 개에 만 원 하는 것을 사서 먹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사람들이 술 맛있다고 하는 거 이해 못 했는데 그때부터 알게 됐어요. 생각해 보니 술을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집에서 혼자 마시고 나면 기분이 괜찮아요? 잘 유지도 되고, 다음 날도 괜찮고 그래요? 네, 괜찮아요. 예전에 동생이랑 살 때는 눈치도 보이고 해서 맥주밖에 못 먹었지만, 요즘은 신나게 먹어요. 장 선생이 우리 집에 머물기 전까지는 집에서 술을 종종 마셨거든요. 마트에서 소주 여섯 병 포장된, 그 종이로 곱게 싸인 걸 카트에 담으면 심장이 두근두근했어요. 이걸 뭐랑 먹을까 싶고. 그리고 매주 금요일마다 고기도 샀다가 회도 샀다가 하면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 있죠, 밤에 남들 잘 때 불 다 끄고 블루투스 헤드폰 쓰고 음악 틀면. 집에서요? 네. 무아지경인 거예요. 그 헤드폰도 장 선생 덕분에 알았거든요. 하여간 좋은 것 많이 배웠어요. 언젠가는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퇴근하는데 술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컵라면을 만들어다가 함께 마시는데 아아, 너무 단 거예요. 이것이 행복이지. 그렇게 한참 기분이 좋았는데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우울해져요. 그냥 맨정신일 때보다 더, 그러다가 울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니까 또 너무 웃긴 거예요. 라면이랑 맛있게 먹고 놀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왔는데 그치질 않아요. 그래서 울면서 설거지를 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도 바람직하세요. 설거지까지 하신다니. 저는 보통 다음 날 하는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데 장 선생이 서울에 출퇴근용 집을 구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와서 살라고, 나 힘드니까 와서 같이 살자고 했던 거죠. 그러면서 월세는 무슨, 냉장고에 맥주만 채워 두라고, 그렇게 된 건데 그 맥주들은 거의 그분 혼자 먹고 저는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싫어져서 안 먹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이제 마시는 게 겁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혹시 그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제목 생각났다. 이거 봤어요? 아뇨. 흥미로운 제목이네요. 언젠가 퇴근하고 이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이 술고래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술을 너무 맛있게 먹는 거예요. 특히 주인공이 친구와 둘이 소주를 마실 때마다 육개장 사발면이랑 햇반을 같이 드시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어 보였어요. 한 오 분마다 나온 것 같아요, 술 장면이. 우리 집에 육개장이 그때부터 있기 시작했어요. 소주잔을 사 온 것도 그날이고요. 사실 그 영화, 술 먹고 글 쓰는 이야기거든요. 재미있어요.

혼자 술을 먹게 된 계기에 친구들이 옆에 없어서도 있는 것 같아요. 대학생 때는 항상 근처에 있었으니까 같이 먹기도 쉬운데 이제 다들 각지에 흩어지고, 일도 하고 그래서 힘들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시작했어요. 친구, 항상 나만 아쉬워하고 나만 찾는 것 같고 해서요. 장 선생 같은 사람이 결혼을 안 했다면 같이 신나게 잘 놀았을 텐데. 모든 사람이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저랑 장 선생님 치킨 먹으러 갈 때 안 나오시잖아요. 저 이유를 모르겠는데 사람들을 마주 보면 두근대고 힘들고 그런 게, 이제 편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봐도 그렇길래 좀 무서워서 피했어요.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까 뭔가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아아 이제 됐다, 했는데 오늘 흥분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나 봐요. 사람하고 마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바보 되는 것 같고 손가락질받는 것도 같고 그래요. 웃기죠. 아니에요. 저도 항상 그래요. 권 선생은 항상 웃고 밝아 보여서 이분은 힘들어도 잘 헤쳐가시는구나 했어요. 그 힘은 역시 술인가 하고요. 아뇨. 저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