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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진다

별은 수명이 다하면 하얗게 타기 시작해서 주변 우주를 밝히고 긴장시킨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점이 된 별은 마지막 폭발을 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데, 이때 별의 일생 중 두 번째로 강한 빛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빛은 다시 많은 시간을 지나 우리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잊으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고 기억을 잊으려면 그 기억과 비슷하지만 더 강렬한 무언가로 시간을 덮어야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잊는다는 건 글로 쓰고 말하기에만 좋은 주제라서 각자의 삶에서는 매번 허둥대고 넘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나는 그런 일에 소질이 없어서 아직 많은 일을 기억하고 떠올린다. 가끔은 내일 갑자기 다음 편이 이어지지 않을까, 전부 연극이 아닐까 상상도 한다. 시작은 희미할지 몰라도 끝은 강렬해서 모든 게 사라지기 위해서는 사람의 일생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매일 아침, 비슷한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생각한다.

매니큐어 생각

생각은 멈출 수 없다. 밥을 먹다가 쉴 수는 있어도 생각은 그럴 수 없다. 일을 하다가 사람이 보이면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방금 했던 생각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땐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다가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게 일이라서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열심히 생각한다는 뜻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검은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들어와 내 앞에 섰다. 머리가 길어서 어디까지가 머리고 어디부터가 스웨터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옆에 선 사람의 손가락에서는 매니큐어가 벗겨지고 있다. 아직 아홉 시가 되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은 왜 벌써 출근하는 걸까 궁금하다. 언젠가 과외 선생님의 손을 보고 ‘매니큐어가 점점 작아져요.’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손을 오므리던 게 생각난다. 다음 날 선생님의 손가락이 깨끗해져 있길래 내가 ‘매니큐어 왜 지웠어요?’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네가 뭐라 했잖아.’라고 했다. 그래서 조금 미안했다. 앞에 선 사람의 키가 커서 여기가 몇 층인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기울이며 자꾸 확인했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도 잘 살아가려면 내리는 층 정도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미안하니까

상처 나고 때 타고 하면 나도 아프거든. 시간 지나면 곪기도 해. 색깔도 변하고 냄새나고 미끌미끌해지고. 네 몸은 부지런히 닦으면서 왜 나는 그냥 두는 거야? 매일은 바라지도 않아. 가끔 신경은 좀 써주면 안 될까? 이러더라니까. 아프다고, 어떻게 뭐라도 좀 해달라는 거야. 눈빛으로 애원하는 거 본 지가 몇 달짼데, 이번에도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했지. 두어 시간 걸렸나. 진짜 힘들더라. 오랜만이라 그런지 때도 엄청 많고. 미안했지. 처음엔 수세미로 닦다가 나중에는 손으로 문질렀어. 진짜 친구 닦아주듯이 말이야. 자주 봐주겠다고 약속도 하고. 그래도 다시 밝아진 거 보니까 좋더라. 생각난 김에 소독도 해볼까. 나 건식 써보고 싶어. 아니면 물기가 있어도 금방 마르는 구조던가. 아니다. 지금도 햇빛은 잘 들어오잖아. 미안하게 또 그래.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울타리의 생명력

꿈에서 학교 안을 헤매고 있었다. 강의실을 찾아가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침을 뱉는다. 벌써 소문이 퍼졌나 싶어 모르는 척을 했다. 팔에 묻은 침을 닦으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다락방을 발견한다. 아무도 오지 않겠지 싶어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든다. 다시 눈을 뜨니 완도항 앞이다. 나는 부산하게 이 가게 저 가게를 드나들고 있다. 반소매를 입었더니 춥네, 생각하면서 가게 밖을 보는데 바다가 얼어 있다. 파도가 치다 만 상태로 얼어서 바다는 굴곡을 그린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겪는 이야기라고, 가게 주인이 말한다. 하필 이런 이야기는 생명력도 주인을 닮아서 질기고 고집스럽단다. 꿈속에서 나는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어떤 속담은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잃었다는 건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니냐고, 빈 종이에 대고 묻는다. 오랜만에 머리를 풀었더니 거울이 반갑다. 의도로 보일 만한 건 모두 없애야 했다. 애초에 내게 뭘 알려준 이도 없었으니 추측만 할 뿐이다. 쉽게 들리는 이야기는 넘겨짚기도 쉽고 기억을 스치기도 금방이다. 부서진 울타리를 보면서 지난 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집중을 조금 덜 했다면 좋았을까 물었더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본래 취미라서 괜찮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