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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가는 날

“○○님은 본인이 여우 같다는 거 알아요?”
“제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던데. 근데 어느 부분이요? 여우 같다는 게 뭐예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한 번씩 되게 얄밉다고 해야 하나.”
“저는 곰입니다. 일단 게을러요.”
“게으르다고 다 곰인가. 지금도 표정 새침한 거 모르죠.”
“난 아무 표정 안 지었는데요.”
“본인은 모르지. 그래서 우리 어디 가요?”
“가보고 싶었던 곳 있어요?”
“저는 아는 데가 없어서. ○○님 좋아하는 곳 보여줘요.”
“그럼 바퀴 닿는 곳으로. 배는 안 고파요?”
“조금? 아직은 괜찮아요.”

“뒷자리에 과자 있는데. 먹을래요?”
“차에서 뭐 먹어도 돼요?”
“흘리지만 않으면.”
“안 먹을래요.”
“괜찮아요. 여기 봉지 있어.”
“대고 먹으라고요?”
“아니, 이건 쓰레기 봉지고.”
“목마르지 않아요?”
“휴게소 나오면 갑시다.”
“네. 배도 좀 고프고.”
“밥은 도착해서 먹을 건데.”
“얼마나 남았어요?”
“안 막히면 한 시간.”
“과자 먹을게요.”

고상한 난봉꾼

“어찌 살고 계시우?”
“고상한 척하면서 미쳐갑니다.”
“왜요?”
“그냥 뭐.”
“개발자 기본 요건이 반쯤 미치는 거라던데, 그래도 정상인인 척할 수는 있잖수?”
“노력은 해요. 지금은 어디쯤입니까?”
“동경 124도 북위 6.5도, 목적지는 광양. 어떻게, 인생의 반쪽은 찾으셨고?”
“아뇨. 찾았나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
“왜요?”
“글쎄요. 필리핀 근처군요. 우리랑 시차도 거의 없겠는데, 많아 봐야 한 시간?”
“오늘 저녁에 한국 시각이랑 맞출 거라우.”
“재미있는 삶이네.”
“배 타시려우?”
“궁금해서 가끔 찾아봐요. 근데 뭐 아는 것도 없고 비슷한 경력도 없으니.”
“인터넷 속도가 초당 최대 1M인 건 함정.”
“좋군요. 헛짓거리 안 하고.”
“핑 700ms는 기본.”
“백과사전 정독할 수 있겠는데요.”
“백과사전을 읽기엔 일이 많은 것도 함정.”
“거기선 스트레스를 뭐로 풉니까? 매일 같은 사람, 같은 환경, 같은 풍경.”
“풀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한동안 그 방에 눌러살았잖아.”
“게다가 간부면 마음 나누기도 어렵겠다. 오늘은 뭐 먹었어요?”
“떡만둣국이요. 징하다 진짜.”
“왜요? 맛있었겠는데.”
“맛없으니 징하지.”
“우리나라에 와서 쉬다가 다시 출항하면 선원도 바뀌고 그래요?”
“타고 있는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바뀌지요. 다음 휴가 지나면 다른 배를 탈 테고.”
“다음번 쉬는 건 언제인가요?”
“9월쯤이지 싶어요.”
“멀구나. 필리핀에서 광양에 왔다가 다시 또 어디 나갔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돈 벌어야지. 이번엔 광양 들렀다가 중국 들르고 호주 갔다가 다시 한국행이겠지요. 그리고 어딘가 한 번 더 다녀오면 휴가. 그렇지만 여행은 아닌 게 함정.”
“이번에 휴가 나오면 꼭 봐야지. 뱃사람은 뭐 하고 사나 인터뷰 땁니다.”
“기회 되면 봅시다. 게으른 일상 뭣이 그리 궁금 타고요.”
“세상 신기한 직업이니까요.”
“그럼 온라인 인터뷰 고고.”
“타자 치는 거로는 맛이 안 나요. 리듬 살려 들어야지.”
“그나저나 ○○님도 어서 짝을 만나야 할 텐데.”
“저는 뭐.”
“어딘가 마음 정착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모르겠어요. 그랬다가 말았다가 해서. 말은 아니라지만, 혼자 살 위인은 아닌 게 분명해요.”
“그걸 이제 알았수?”
“고상한 척 좀 그만해야지.”
“고상해도 ○○님이고 난봉이어도 ○○님이고. 나연씨가 안 보이니 섭섭하긴 하네.”
“나연님 큰 사건 하나 터뜨리고 사라졌어요.”
“왓더? 나연씨가?”
“내 심심할 때 썰 풀어드리지. 그게 사건까지 되는지는 관점 따라 다르겠지만.”
“걔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뭐, 간이 좀 큰 분이었던 걸로.”
“지금 당장, 릴리즈 플리즈.”
“지금은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요. 오랜만에 회포를 푸니 기분이 나아집니다. 기다려 보시오. 곧 얘기해줄 테니.”
“민지님은 어디?”
“그분은 따로 방에 있어요. 비둘기로 검색하면 나오는데.”
“됐수. 요 배가 삼천포를 드나들어서,”
“거기도 큰 배가 들어갈 수 있군요.”
“그냥 민지님이 생각나긴 했는디.”
“올가을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삼천포에?”
“네. 어떻게 지내나 봐야지.”
“사람 사는 게 뭐 있겠수.”

살면서 보니

키가 140이 되기 전까지는 그냥 살았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게 재미있었을 때다.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기분이 좋으면 크게 웃고 싫으면 떼쓰고 소리도 지르고 그랬을 거다.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때가 많아서 집에서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도 뭘 하든 재미있어서 밖에 나가는 것쯤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10대를 보내면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고 뭘 해도 다 잘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이루어져 있을 테니 나이만 들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어른들이 부러웠다.

20대를 살면서 나는 예상대로 뭐든 다 잘한다는 걸 알았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서 한두 가지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특별한 존재는 재능을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꼭 필요할 때 쓰려고 미뤄두기도 했다. 게으름도 나름의 전략이었다. 곧 많은 것이 이루어질 테니 마음의 준비만 하자고 했다. 내 시간은 여전히 느렸지만 이제 익숙해서 괜찮았다. 그리고 30대가 되자 꿈이 하나씩 부서졌다. 나는 상상하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했던 건 누구나 할 줄 아는 것들이었고, 나는 종종 일을 쉽게 망쳤다.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내 머리에서는 매일 넘어지고 망가진 것들이 남아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하고 싶은 것들은 하나씩 ‘그때’ 하고 싶었던 것으로 바뀌어 갔다.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지,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결말을 알고 싶지만 시간은 느리기만 하다. 노인이 되고 머리가 하얗게 세면 좀 더 알게 될지 모르겠다. 어서 나이가 많이 들면 좋겠다.

바쁘게 해주세요

집에 조용히 있으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납니다. 생각은 여러 가지일 때도 있고 좁은 범위에서 빙빙 돌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니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안 봐도 뻔히 아는 것을 확인하려고 찾다 보면 답답하고 조바심도 나고 그런 거라고요. 그런데 저는 욕심나는 것이 없습니다. 딱히 찾는 것도 없고요. 저보다 인생 선배인 분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을 해줍니다. ‘직관으로 살아라. 어른들처럼.’ 오랜만에 듣는 단어라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또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세상을 보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걸까요. 그런 삶이 가능한가요?

조용히 쉬다 보면 한 번씩 회사에 가고 싶습니다. 회사에 있으면 집에 가고 싶은데 집에 오면 일이라도 했으면 하는 겁니다. 바쁘면 생각을 안 하게 되거든요. 가끔 다 그만두고 쉬는 상상도 합니다만, 회사를 그만두면 저는 빠르게 미치고 말 겁니다. 차라리 생각하기를 그만둬야 합니다. 아주 바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배고픔과 졸림만 느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만 해도 조바심이 납니다. 한번 든 생각을 없애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쉬는 날 집에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곳은 너무나 평온해서 숨이 막힙니다.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서 월요일이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