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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감

결국 다시 잠드는 데 실패했어요. 대신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기로 했습니다. 한참 먼지를 닦고 자리에 앉았는데 손톱이 자랐는지 건반에 손이 딱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치다가 손톱을 깎았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청소도 하고 손톱도 깎고 피아노에게 고맙군요. 다시 자리에 앉아 하농을 쳤습니다. 역시 재미없습니다. 이어서 쿨라우의 소나티네를 쳤습니다. 피아노를 사고 제일 많이 친 곡인데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봐가면서 더듬더듬 쳤습니다. 시간이 금방 갑니다. 어두울 때 시작했는데 집이 밝아졌습니다. 피아노를 닫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우유에 꿀을 타서 마십니다. 오랫동안 반복했더니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가끔 낮에 우유를 마시면서도 뭔가 새로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환기가 필요할 때 우유를 사 먹기도 합니다. 카카오톡을 괜히 살린 것 같습니다. 이번엔 꼭 버텨보고 싶은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말도 걸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피해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자꾸 미안하고 두려운 감정이 듭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알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기다림

나는 입국장 의자에 앉아 유리 벽 너머를 본다.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에게 달려간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누군가는 묵묵히 듣는다. 서로 끌어안고 우는 사람도 있다.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와 비슷하게 유리 벽 너머를 본다. 사람들이 서로 재회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오늘은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마주칠 예정이 없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나는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떠난다. 어딘가로 떠나는 행위는 정상적인 한 주를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새로운 곳에 머물 때마다 다른 어딘가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 짐을 가볍게 꾸린다. 나는 매일 해가 지면 그날의 묵은 뉴스를 본다. 가끔 머무는 곳의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매일 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찾는다.

나는 내 삶을 지배하는 여러 규칙을 생각한다. 어떤 규칙은 내 하루를 잘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나는 잃고 싶지 않았으나 잃어버린 삶의 모습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그 삶에 어울리지 않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한다. 나는 갖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는 넘치게 소유해버린 많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매일 많은 것이 나를 떠나지만 그만큼 새로운 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빈자리를 모르고 산다. 나는 규칙에서 멀어지고 싶다.

토마토와 소년

냉장고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찬장을 열고 잔을 세어 본다. 몇 명이라고 했지? 대답이 없다. 남자는 찬장 문을 닫고 테이블로 다가가 앉는다. 어젯밤에 분명 여기 두었는데 와인이 보이지 않는다. 저 그림, 마음에 들어요. 선생님이 그린 거죠? 글쎄. 워낙 작품이 많아서 나도 잘. 남자는 냉장고를 열고 토마토가 들어 있는 봉지를 꺼낸다. 접시 어디에 뒀어? 말이 없다. 남자는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문다. 바닥에 물 떨어지면 안 돼. 뭐라도 받치고 먹어. 봉지 있잖아. 아니면 손이라도. 토마토는, 냉장고에서 막 꺼냈는데도 불구하고 시원한 맛이 없다. 너도 과일 좋아하는구나. 네. 하지만 먹고 싶을 때만 먹어요. 냉장고 아직 되는 거지? 아직 말이 없다. 선생님은 어쩌다가 화가가 됐어요? 기억나지 않아. 아까 뭐가 마음에 든다고? 남자는 벽에 걸린 그림 중 하나를 가리킨다. 저는 이게 제일 좋아요. 멋있어요. 너 옛날 사람들이 초능력을 믿었다는 거 아니? 저는 지금도 믿는걸요. 남자가 뒤로 돌아선다. 선생님은 그림이 왜 좋았어요? 글쎄. 나는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아.

물고기 아저씨

1.
잠들었다면 미안하다. 그저 목소리나 들을까 했지. 여기는 냄새가 지독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아직 연기가 나는 곳도 있어. 이럴 때 네가 있으면 좋을 텐데. 곧 사람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나는 괜찮아. 마실 건 조금 남아 있어.

2.
저 물고기는 언제부터 여기에 살았어요? 밥은 뭐 먹고살아요? 어릴 때 책에서 봤는데 옛날에는 사람도 물고기였대요. 바다에서 올라왔다던데, 아가미랑 지느러미도 있고 몸에 비늘도 있었대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빠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누가 그런 소릴 하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책을 보여줬더니 순 엉터리래요.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한 거라고, 엉덩이에 꼬리도 달려 있었다던데요. 꼬리라니. 좀 징그럽죠. 엄마는 또 뭐라는 줄 알아요? 사람은 신이 만든 거래요. 처음에 빛이랑 어둠만 있었는데 땅이 생기고 나무랑 동물도 생기고, 그러다가 마지막 날 사람이 나온 거래요. 그리고 이걸 다 신이 만들었대요. 그래서 제가 찰흙으로 인형 만드는 거랑 비슷한 거냐고 했더니 그거랑은 또 다르다고 했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물고기도 싫고 원숭이도 싫고, 누가 만들었다는 건 더 싫어요. 게다가 신이 한두 명도 아니라면서요. 학교에서 선생님은 또 이렇게 얘기했어요.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신은 그들 자신이 만든 거라고. 말 되게 어렵죠. 저도 처음 들을 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통째로 외웠다니까요. 사실 여기 올 때마다 그 생각 했어요. 물고기가 보이니까요. 원래 없을 땐 모르다가도 있으면 생각나고 집착도 하고 그런 거라면서요. 어른들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요? 그런데 아저씨는 왜 밥을 안 먹어요? 저는 배가 고프면 움직이지도 못해요. 아마 여기에 오지도 못할걸요. 쟤들도 굶기는 건 아니죠? 물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아저씨 저 물고기한테 과자 줘도 돼요? 아니면 아저씨한테 좀 나눠 줄까요? 아저씨는 언제 또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