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쓴 여자가 계단을 오른다. 진동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진 아파트에는 부서진 잔해만 남아 공간을 채운다. 여자는 옥상에 올라 건너편 건물을 본다. 아직 파란 칠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물을 맞고 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호스를 들고 이리저리 물을 뿌리면서 한 번씩 고함을 친다.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다. 이리 와요, 여기 물이 있어요. 여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당신들은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를 부를 수 있죠. 여자는 아파트 일 층 입구에서 홀로 빛나는 동상을 내려다본다. 주민 자치를 기념한다고 세운 동상은 운이 좋게도 폭발을 피해 갔다. 여자는 세계가 저 혼자 싸움을 벌이다가 기어이 무너지고 만 것으로 생각한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파트 옥상을 보고 웃는다. 이리 와요, 여기는 이제 비가 오지 않아요. 우리한테 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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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노래
걷는 사람은 단순하게 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무심히 흘러가는 것의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그동안 배우려고 했던 것과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얻을 수 없던 것의 차이를 탐구한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오늘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매일 무엇으로부터 살아남고 있는지, 그리고 어제와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극복해낼 용기가 없다. 걷는 사람은 자신이 더는 청년이 아니란 사실을 안다. 이제 기대와 희망 대신 옳고 그름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지보다 어떻게 해야 미움을 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그의 마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걷는 사람은 제 몸을 살펴본다. 마치 동물이 털을 고르듯이 몸 구석구석을 빗어낸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는다. 그는 스스로가 낯설다.
카드의 위로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7년 전 어느 식당에서 세진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 직원이 다가와 세진을 진정시켜야 했고, 나는 테이블에 남겨진 음식을 보다가 식욕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세진은 자신을 달래주던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나 잠시만, 하고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몇 분이 지나서야 돌아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있다가 나 할 말이 있어,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세진을 밀쳐내고 가방과 짐을 챙겨서 거리로 나섰다. 세진은 뒤따라 나오면서 어디 가, 내 말 좀 들어봐, 하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꽤 컸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세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바로 옆에 보이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고, 메뉴판에서 제일 싼 안줏거리와 버드와이저 두 병을 주문했다. 너 내 카드 봤어? 세진은 가방을 뒤지다가 고개를 저었는데 나도 주머니와 지갑을 살피다가 아까 식당에 두고 온 거 아닐까, 아냐 카드는 꺼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집에 있는 거 아니겠지, 너 집 여기서 얼마 안 멀잖아, 그래서 다녀오라는 말이니, 하면서 카드의 행방에 대해 오 분여를 넘게 추측했다. 그러던 중 버드와이저가 나왔고, 그 바람에 우리는 카드의 존재를 빠르게 잊어버렸다. 한참 뒤에 세진은 잠긴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안주로 나온 올리브 절임에 집중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지 뭐, 괜찮아, 하고 건배를 제의했고, 그제야 세진도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식당을 나오면서 세진이 아까 했던 말 있잖아, 하면서 복습을 시켜준 덕분에 그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얼마나 그를 무심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게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술이 시작된 곳
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예요. 대학생 때는 그냥 멋모르고 먹었고, 회사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맥주를, 그 다섯 개에 만 원 하는 것을 사서 먹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사람들이 술 맛있다고 하는 거 이해 못 했는데 그때부터 알게 됐어요. 생각해 보니 술을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집에서 혼자 마시고 나면 기분이 괜찮아요? 잘 유지도 되고, 다음 날도 괜찮고 그래요? 네, 괜찮아요. 예전에 동생이랑 살 때는 눈치도 보이고 해서 맥주밖에 못 먹었지만, 요즘은 신나게 먹어요. 장 선생이 우리 집에 머물기 전까지는 집에서 술을 종종 마셨거든요. 마트에서 소주 여섯 병 포장된, 그 종이로 곱게 싸인 걸 카트에 담으면 심장이 두근두근했어요. 이걸 뭐랑 먹을까 싶고. 그리고 매주 금요일마다 고기도 샀다가 회도 샀다가 하면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 있죠, 밤에 남들 잘 때 불 다 끄고 블루투스 헤드폰 쓰고 음악 틀면. 집에서요? 네. 무아지경인 거예요. 그 헤드폰도 장 선생 덕분에 알았거든요. 하여간 좋은 것 많이 배웠어요. 언젠가는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퇴근하는데 술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컵라면을 만들어다가 함께 마시는데 아아, 너무 단 거예요. 이것이 행복이지. 그렇게 한참 기분이 좋았는데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우울해져요. 그냥 맨정신일 때보다 더, 그러다가 울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니까 또 너무 웃긴 거예요. 라면이랑 맛있게 먹고 놀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왔는데 그치질 않아요. 그래서 울면서 설거지를 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도 바람직하세요. 설거지까지 하신다니. 저는 보통 다음 날 하는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데 장 선생이 서울에 출퇴근용 집을 구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와서 살라고, 나 힘드니까 와서 같이 살자고 했던 거죠. 그러면서 월세는 무슨, 냉장고에 맥주만 채워 두라고, 그렇게 된 건데 그 맥주들은 거의 그분 혼자 먹고 저는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싫어져서 안 먹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이제 마시는 게 겁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혹시 그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제목 생각났다. 이거 봤어요? 아뇨. 흥미로운 제목이네요. 언젠가 퇴근하고 이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이 술고래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술을 너무 맛있게 먹는 거예요. 특히 주인공이 친구와 둘이 소주를 마실 때마다 육개장 사발면이랑 햇반을 같이 드시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어 보였어요. 한 오 분마다 나온 것 같아요, 술 장면이. 우리 집에 육개장이 그때부터 있기 시작했어요. 소주잔을 사 온 것도 그날이고요. 사실 그 영화, 술 먹고 글 쓰는 이야기거든요. 재미있어요.
혼자 술을 먹게 된 계기에 친구들이 옆에 없어서도 있는 것 같아요. 대학생 때는 항상 근처에 있었으니까 같이 먹기도 쉬운데 이제 다들 각지에 흩어지고, 일도 하고 그래서 힘들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시작했어요. 친구, 항상 나만 아쉬워하고 나만 찾는 것 같고 해서요. 장 선생 같은 사람이 결혼을 안 했다면 같이 신나게 잘 놀았을 텐데. 모든 사람이 혼자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저랑 장 선생님 치킨 먹으러 갈 때 안 나오시잖아요. 저 이유를 모르겠는데 사람들을 마주 보면 두근대고 힘들고 그런 게, 이제 편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봐도 그렇길래 좀 무서워서 피했어요.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까 뭔가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아아 이제 됐다, 했는데 오늘 흥분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나 봐요. 사람하고 마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바보 되는 것 같고 손가락질받는 것도 같고 그래요. 웃기죠. 아니에요. 저도 항상 그래요. 권 선생은 항상 웃고 밝아 보여서 이분은 힘들어도 잘 헤쳐가시는구나 했어요. 그 힘은 역시 술인가 하고요. 아뇨. 저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