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가 찾아왔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을 보셨다고요. 여기에 쓰러져있던 사람이 당신 맞습니까. 저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깨어나 보니 집 앞이었어요. 신문기자가 내 눈을 들여다본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이 더 있습니까. 옆집은 언제부터 비어 있었습니까. 저는 세 들어 사는 사람이고, 주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일할 시간이라 없고, 밤 열 시는 돼야 돌아오는데 가끔 안 올 때도 있습니다. 층이 달라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고요. 그리고 보면 아시겠지만, 동네가 조용합니다. 한 일 년 전부터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해서 이제 옆집뿐 아니라 거의 모든 집에 사람이 없어요. 당신은 왜 남아 있죠. 저는 남은 게 아니라 여기에 온 겁니다. 일은 해야겠는데 집이 멀어서요. 직장이 근처인가 봅니다. 차를 타고 한 삼십 분은 가야 합니다. 빈집이 많아서 을씨년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제일 쌉니다. 돈이 없어서 다른 동네는 구경도 못 했어요. 당시 총을 들고 있던 사람을 전에도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안경도 부서져서. 시력이 많이 안 좋습니까. 보시다시피, 돋보기를 껴야 합니다. 신문기자가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주인을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입니까. 지난주엔가, 집을 나서다가 봤습니다. 그때가 몇 시쯤이었죠. 글쎄요, 시계를 보진 않아서. 아마 해가 막 저물 때였을 겁니다. 평소에 신문은 보십니까. 아뇨. 글자를 보면 머리가 아파서. 티브이로 뉴스는 가끔 봅니다. 공범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도가 뭐였을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기억나는 것도 없는데. 혹시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손에 든 그거, 전화기 아닙니까. 배터리가 막 나가서요. 잠깐 들어오십시오. 혼자 사는 것치고 집이 꽤 넓습니다. 예, 뭐. 지낼만합니다.
Category: Blog
평범함이란 선물
내 전화기는 거의 울리는 일이 없다. 전화가 걸려와도 신호음이 나지 않거나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그냥 지나칠 때가 많다. 어쩌다 실수로 받으면 대부업체의 광고거나 교우회에서 돈을 내라거나 하는 전화일 뿐이다. 집에 누가 찾아오는 일도 없어서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엄마나 아빠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일도 없거니와 친구가 깜짝 방문할 일도 없어서 한 반년쯤 집에만 머문다 해도 벨이 울리거나 누가 밖에서 ‘계세요? 없어요?’ 하고 부를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삶이 가능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책도 보고 공상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제와 다르지 않지만 편안한 익숙함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회사에 다닐 때는 퇴근하면서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큰 길가를 오가는 게 좋았다. 가끔 운이 좋으면 굉음을 내면서 달리는 멋진 차를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상상을 했다. 집 근처 골목에 들어서면 냉장고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버드와이저와 소시지 생각에 코가 벌름거렸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면 가방만 벗어 던지고 냉장고 앞에 앉아 맥주 캔부터 따곤 했다. 그 시절 나의 하루가 행복해지는 데는 그리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아마 집은 오래전부터 이런 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소시지를 굽다가 말고 와인이 생각날 때도 있었는데, 집에 남은 와인이 없다는 걸 알면 마트로 달려가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것으로 두 병을 사다가는 한 병은 그대로 마시고, 남은 한 병은 주말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다. 대체로 정신이 들면 새벽 두 시쯤이었고, 그제야 나는 냉장고 앞을 벗어나 침대로 갔다. 그리고 이렇게 잠자리에 드는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주말이 되면 남은 맥주와 와인으로 이틀 동안 파티를 벌였는데, 조금씩이긴 해도 쉬지 않고 마셨기 때문에 취한 것도 아니고 멀쩡한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침대와 완전히 멀어지거나 침대에 꼭 붙어만 있는 채로 주말을 지내고 나면 월요일이 왔고, 해가 중천에 닿은 뒤에야 나는 그날이 월요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 덕분에 월요병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지만, 동시에 주말 계획을 세워본 일도 없었다. 가끔 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늘은 어디쯤인가 한참을 생각하다가도 냉장고 앞에 앉아 맥주를 해방하는 순간 고민은 그저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익숙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한없이 평범했지만, 반복된 하루 속에서 내가 누린 것은 정형화된 행복이었다. 그것은 버튼만 누르면 가질 수 있는 선물이었으며 오직 이 집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해리스 푸딩
웬일이야, 이 시간에? 연차 냈지. 바빠? 그냥. 일하는 중. 나 너네 회사 근처다. 야, 말도 없이. 놀라기는. 방금 지나갔어. 아 그래. 은근히 근속한다 너. 아직 잘 다니나 보네. 너야말로 진짜 웬일이야? 내가 뭐 보고하고 쉬고, 그래야 하냐. 아니 뭐. 여행이라도 하는 거야? 주말에 가족 모임이 있어서 벌초하러 왔어. 모임을 산소에서 해? 응. 그러자고 하더라고. 오랜만에 풀냄새도 맡을 겸. 오니까 좋구나. 어릴 때 여기서 숨바꼭질하고 그랬는데 말이야. 기억하는구나. 너 벌에 쏘였다고 울고불고. 야, 너도 당해보라니까. 네가 운 게 그거뿐이었겠니. 그래서, 요즘도 해리스 좋아해? 해리스? 그게 뭐더라. 그새 잊었구나. 너 우는 거 달랜다고 사줬더니 좋다고 막, 한동안 찾고 그랬잖아. 아, 그. 무식하게 단 거. 맞지? 그래 푸딩. 내가 박스로 사준 건 기억나? 맞아. 나 그거 먹다가 이빨도 상했었잖아. 그건 네가 양치를 안 했기 때문이고. 요즘은 좀 부지런하니? 말도 마. 치과 무서워서 칫솔도 제일 비싼 거만 사는 사람이야. 그런데 벌초는 혼자 가? 응.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해서.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을까? 그래. 와서 동네 구경도 좀 해. 여기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문방구는 아직 있겠지? 응. 손님 없는 것도 그대로야. 야, 누가 나 찾는다. 가봐야겠어. 그래, 이따 전화해.
허락된 사람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 나와는 다른 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여러 현실을 경험했지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게 많아요. 반면에 당신은 채워진 답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둥그렇게 뜬다면 그건 어떤 의문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이야기를 흡수하는 과정일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완전히 나의 것이 아닌 사람은 곁에 둔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가능성도 포함되는데, 단 며칠이라도 내 모든 것이 될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잠시나마 교류해볼 수 있었어요. 시한부 관계라고도 하지요.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대부분의 사람은 내 존재를 몰랐던 때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가끔은 의미 있는 관계를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한 상자에 담아 두고는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봅니다. 나의 어릴 적 소중했던 동네 친구, 한때 헤어지기 싫어 울고불고했던 나의 사촌, 밥을 복스럽게 먹는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식당 이모, 나는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받지는 못했던 사람, 나는 잘 몰랐지만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던 사람, 나를 유난히 귀여워해 주던 의사,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담긴 그 상자는 가끔 스스로 닫혀 모습을 감추기도 합니다. 어쩌다 한 번씩 슬픔에 잠길 때면 그런 상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기 때문이지요. 이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비밀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없을 때 당신은 이 상자를 보면서 나를 생각하겠지요. 나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그때 가끔 생각이나 해주십시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상자를 해체해도 좋습니다. 내가 당신을 허락했듯이 나 또한 당신의 광기가 받아들인 유일한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