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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한동안 거울에는 내가 비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울을 보지 않았다. 가끔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을 보면서는 얼룩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말하길 얼룩은 곧 자신의 부끄러움이라고 했는데 나는 부끄러움이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생명이 있었다. 누군가 입을 묶어둬서 짖지도 못하던 개는 꼬리만 열심히 흔들다가 지치면 잠들고, 다시 깨어나면 끙끙대면서 또 꼬리만 줄기차게 흔들다가 잠들곤 했다. 사람들은 이 개를 호랑이라고 불렀다. 온몸이 얼룩으로 덮여 있다는 게 이유였다. 개는 누구든 호랑, 하고 부르면 자다가도 금세 깨어나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왔다. 나는 호랑을 보면서 쥐를 떠올렸다. 가끔 방구석에서 마주치는 쥐는 꼬리가 유난히 길어서 혹시 뱀이 환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쥐를 보는 게 무서워서 집에 잘 있지 않았다. 쥐는 한동안 거울 속에 머물렀다.

시간의 이해

나는 가끔 여기 앉아서 해를 봐. 해가 뜨고 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나를 지나가는 게 느껴져. 눈이 부실 때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어. 해가 지고 나면 오늘은 끝이야. 이제 내일을 준비해야 하지. 아니면 남은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거나.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사라진 해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해 생각해. 둥글게 반원을 그리다가 사라진 해는 나머지 반을 어디에서, 누구에게 보여주고 있을까 생각해. 그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 혼자 사는 사람은 시간이 아주 많아. 그러니 그 시간을 채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시간은 아무렇게나 흐르다가 사람을 잡아먹고 말 거야. 그래서 나는 창밖을 봐. 반투명 유리 건너편에 뭐가 있을지 상상하면서 해가 오르내리는 걸 지켜봐. 거기서 뭔가 보게 되기를, 시간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내가 기대한 적 없는 뭔가가 생겨나기를 바라. 모든 일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게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하고 싶어.

별이 진다

별은 수명이 다하면 하얗게 타기 시작해서 주변 우주를 밝히고 긴장시킨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점이 된 별은 마지막 폭발을 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데, 이때 별의 일생 중 두 번째로 강한 빛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빛은 다시 많은 시간을 지나 우리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잊으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고 기억을 잊으려면 그 기억과 비슷하지만 더 강렬한 무언가로 시간을 덮어야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잊는다는 건 글로 쓰고 말하기에만 좋은 주제라서 각자의 삶에서는 매번 허둥대고 넘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나는 그런 일에 소질이 없어서 아직 많은 일을 기억하고 떠올린다. 가끔은 내일 갑자기 다음 편이 이어지지 않을까, 전부 연극이 아닐까 상상도 한다. 시작은 희미할지 몰라도 끝은 강렬해서 모든 게 사라지기 위해서는 사람의 일생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매일 아침, 비슷한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생각한다.

작품이 들어왔다

열두 시가 지나고 가게 문이 열린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서 문 앞에 팻말을 두고 잠시 서성이더니 사라진다. 몇 분 뒤 사람들이 가게 앞을 지나다가 팻말을 보고 걸음을 늦춘다. 팻말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사람들은 팻말을 보다가 가게를 보고, 다시 팻말을 유심히 보다가 가게 안을 살핀다. 가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서 자전거가 나온다. 자전거는 가게 앞을 지나다가 팻말을 보고 멈춰 선다. 팻말은 자전거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멀리서 한 사람이 자전거를 발견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자전거는 사람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자신의 등을 내어 준다.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트럭이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운전자가 내려서 트럭의 뒷문을 열고 누군가를 부른다. 가게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운전사와 한참 이야기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트럭 안으로 사라졌다가 곧 자신의 키보다 큰 물건을 끌고 나온다. 물건은 복잡한 무늬의 천으로 싸여 있다. 운전자가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자 남자는 손을 흔든다. 그리고 트럭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시 나와서 팻말 위에 무언가를 덧쓴다. 사람들이 가게 앞을 지나다가 팻말을 보고 손을 흔든다. 팻말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물건을 옮기던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손을 들어 내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여자는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다가 말고 길 건너편 가게를 본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여서 눈앞으로 잔상이 남는다.